[목사가 듣고 은혜받은 우리 교회 전도 설교] 닫힌 마음을 열어 예수께로 인도하는 생명의 목소리

등록날짜 [ 2017-11-02 11:24:39 ]

윤 목사처럼 설교자가 애절한 주님 심정 담아 설교할 때
진심이 전해져 수많은 이가 예수 믿게 돼


<사진설명> 이웃초청 예수사랑큰잔치에서 설교하고 있는 윤석전 목사.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일종의 논쟁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소리친다 한들, 사람이 짐승이 아닐진대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적어도 신앙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머리를 사용해서 추리를 하기 때문에 저 사람의 말이 어디서 틀렸고, 어디서 말도 안 되고 하는 이런 내용을 다 알아챕니다. 설득하고 납득하고, 때론 논쟁을 하면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실상, 성경의 위인들은 하나님과 끊임없이 논쟁하고 때로는 항의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욥은 하나님과 쟁론하기를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대답을 얻어 내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시편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설득을 당하는 장면들이 이어져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하나님을 닮아서 생각하고 추론하고 감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코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믿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은 내심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기 전에는 결코 순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실상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을 것인가? 하나님이신가? 마귀인가?

설교도 일종의 논쟁이고 쟁투이고 설득입니다. 그래서 ‘아무말 대잔치’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설득하고 납득케 해서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믿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설교는 정교한 설득의 논리가 그 설교의 흐름에 담겨 있어야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웃초청 대잔치’에서 전하신 윤석전 목사님의 전도설교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설교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특성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설교자의 간절함입니다.

“애절하게 간청하노니, 저의 애절함으로 말씀을 전하노니 지금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저의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윤 목사님의 설교에는 특유의 간절함이 참으로 잘 드러납니다. 간절함이 간절함을 이끌어 냅니다. 설교에 간절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설교를 듣는 자들은 귓등으로 그 설교를 흘려듣고 말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간절함이 더 간절한가에 따라 그 승패가 결정됩니다.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자들을 향한 그 절실한 간절함, 애절함 때문에 설교가 승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강의와 결별합니다. 교실의 강의는 학기말 시험이라는 나름의 절박함을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절박함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절실함과 간절함이 넘쳐 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쓰라린 마음이 그 설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설교를 통해서 드디어 설득되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으면 학기말 시험을 망치지만, 설교를 듣지 않으면 인생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그 간절함은 참으로 절실하게 됩니다.

정말 윤 목사님의 설교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 애씀과 간절함이 드러나고, 듣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절실함에 빨려 들어갑니다. 간절함과 절실함은 부모의 심정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늘 설득력이 최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간절함이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합니까? 물론 간절함만 갖고는 안 됩니다. 그러나 간절함이 없이는 설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간절함은 바로 설교를 듣는 믿지 않는 자들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회개를 열매로 맺지 않으면 안 되기에 설교자는 간절함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자는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간절함으로 설교를 전하게 됩니다.

두 명의 지휘자가 늘 비교됩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는 그 지휘 스타일의 차이로 비교됩니다. 카라얀의 지휘는 수려와 화려함의 극치를 만들어 냅니다. 영상으로 보아도 지휘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음악을 듣기보다는 지휘자의 지휘에 매혹되어 지휘자의 지휘를 보고 막상 음악을 듣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첼리비다케는 그와 같이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는 음악에 몰두하여 하나의 음, 하나의 멜로디를 절절하게 지휘해 냅니다. 하나의 음이 마치 그의 영혼을 담은 듯이 절실하게 우리의 귀를 때립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절실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의 삶과 헌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간절한 메시지는 아무리 처음 그 말씀을 듣는 자라 해도 깊이 감추어진 영혼의 심연(深淵)을 다시 드러내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도는 무엇일까요?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자를 멀찍이서 “어, 저 사람이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어라, 이제는 물속으로 쏙 들어갔네! 이제 물 밖으로 쏙 나왔네!” 하면서 구경하지 않습니다. 전도는 죽음의 절박함 앞에서 절실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간절함으로 온몸을 던져서 죽음을 내어쫓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간절함을 낳습니다.



<사진설명> ‘이웃초청 예수사랑큰잔치’에서 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설교를 듣고 난 후 기도하고 있다. 조영익 기자

둘째, 기원(起源) 의식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짐승은 생각하지 않고 먹을 것에 그냥 몸으로 반응해서 아무 데서나 배가 부를 때까지 먹습니다. 사람의 몸도 먹을 것에 반응하지만, 먹을 때와 장소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사람은 전 세계가 무장을 해서 달려들지 않아도, 물 한 방울, 공기 한 줌으로 사그러지게 할 수 있는 연약한 갈대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전 세계보다 더 위대한 이유는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블레즈 파스칼).

윤 목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짐승과 거리를 두는 첫걸음은 자신의 주제를 생각할 줄 아는 겁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즉 나 자신의 기원(起源)에 대한 물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그 자체로서도 대단히 수준 높은 질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을 묻지 않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만큼 나 자신의 기원에 대한 물음은 근본적입니다. 사람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영혼의 질문, 아무리 놓아 버리려고 해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물음, 늘 내 주위를 맴돌고 나를 떠나지 않으며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 나는 죽음 후에 어디에 처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람을 괴롭히는 물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 물음 앞에 정직하게 서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 물음을 갖게 되면, 그는 훌쩍 하나님께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조금만 더 끌어 주면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이와 같이 반드시 사람 자신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라는 기원 문제는 인간 종말이라는 또 다른 문제와 관련됩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에는 진화론의 허위와 우주의 기원, 생명의 기원이 들어 있고, 즉시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라는 사람의 종말, 죽음과 죽음 후의 문제가 설명되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지옥에 관한 설교가 거의 잘 선포되지 않고 있습니다. 1년 내내 지옥에 관한 설교가 한 번도 없습니다. 연세중앙교회 부흥의 원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지옥을 설교하고, 지옥은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설교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지옥은 사람의 사후 운명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성경 말씀이고, 늘 새기고 놓치지 말아야 할 성경의 주제입니다.

윤 목사님의 전도설교의 논리는 인간 삶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기원 문제를 거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간 삶의 종말, 지옥의 문제로 이르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결국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셋째, 죄인 의식입니다.

주제 파악은 늘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사람은 자기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합니다. 아침에 잠시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흘낏 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자신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합니다.

내 모습이 어떤지 잘 알지 못하고 지납니다. 사람의 눈은 자신의 바깥을 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길게 뽑아서 자신을 향하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거울로 보는 내 모습은 사실 내 모습의 극히 적은 일부분입니다. 자는 모습, 화내는 모습, 놀라는 모습, 말하는 모습, 글 쓰는 모습 등 수없이 많은 내 모습이 거의 내 시선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가장 귀한 말씀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주제 파악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인 의식을 놓치면 모든 것을 다 놓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내가 죄인입니다, 내 죄가 나를 괴롭게 하고 나는 죄의식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는 고백을 발판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또 다른 고집, 자기 의로움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늘 자신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이 틀렸고, 오류가 있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죄의식이여!(FELIX CULPA)”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죄의식이 없었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죄인이라고 하고, 내가 죄의식을 갖는다면,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이는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죄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식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알고,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신앙하게 됩니다.



<사진설명> 연세중앙교회는 교회에 처음 온 이들이 설교 말씀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마음 문을 열도록 전 부서에서 문화 공연을 준비한다. 프로페셔널 한 공연 수준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전하려고 기도로 준비한다. 강문구 기자

넷째, 꼬드기기.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꼬드겨서”(“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호2:14) 하나님의 자리로 되돌아오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개유(開諭)’하신다는 말씀은 살살 달래고 타이르고 꼬드겨서 설득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병에 결렸는데, 쓰디쓴 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약의 겉에 설탕을 발라서 아이를 꼬드기고 달래고 얼러서 약을 먹도록 하는 애절한 장면입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끝내 큰 병에 걸려서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특히 전도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설교의 재미입니다. 1시간이 훌쩍 넘는 동안 한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은 요즘 사람들, 청년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이고, 한편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말씀의 깊이와 별도로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웃음이 있고, 유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릅니다. 이는 설교자가 권위 있는 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믿지 않는 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 자리에 서서 함께 있을 때 가능합니다(As One Without Authority by Fred B. Craddock).

웃음은 듣지 않으려 하는 자들의 무기를 내려놓게 합니다. 함께 웃었기에 그들은 이제 마음을 열고 설교자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기 방어의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고 복음의 자리로,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합니다. 웃음은 어린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는, 마치 단 것으로 겉을 포장한 당의정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지 않는 자들을 꼬드겨서 먹도록 하는 실력과 기술이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특히 엄숙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웃음과 유머는 설교에서 불신자들의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음을 풀어 줍니다.
꼬드기는 자는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들의 자리로 기꺼이 내려갑니다. 그리고 간절함으로 그들을 꼬드겨서 위로 오르게 합니다. 흙탕물 속에서 지저분하게 놀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지 못하고 신나서 떠들고 취해서 하루를 보내고 끝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인도하여 맑고 깨끗한 하나님의 생명의 삶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를 배우도록 합니다.

불신자들을 향한 전도설교는 특히 낮은 자들의 자리로 내려가서 정확한 발음으로 한마디 한마디 간절한 설득의 구조를 지닙니다.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기원의식과 죽음 이후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종말의식, 그리고 진화론과 생명과 우주의 기원도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이는 결코 기독교신앙에 불리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경우이긴 하지만 과학자의 40%가 크리스천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 신앙에 플러스 요인입니다. 여기에 지옥 문제가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인간 운명을 다루는 전도설교에서 지옥은 아주 강조되어야 합니다. 역설이긴 하지만, 지옥 설교 없이 교회 부흥은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지옥을 설교에서 제거해 버리자 교회 부흥은 주춤거립니다. 현대는 지옥을 없애고, 동시에 교회도 없애려 합니다. 교회가 참된 복음을 굳게 붙잡고 힘 있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교회 부흥을 함께 주실 것입니다.

사족: 2,000여 명이 결신 카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고 들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일일이 추적해서 단연코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간절한 설교에 설득된 그들의 평안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지나치면서 두세 살짜리 어린아이들을 큰 방에 풀어놓아 뛰어놀게 하고, 그곳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100여 명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겨움과 은혜가 훅 하고 밀려 들어왔습니다.



/김병제 목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



 

위 글은 교회신문 <54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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