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11-14 14:48:30 ]
왕의 말씀은 취사선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설교는 왕이신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이니
사람의 의견과 교회 전통이 제한해서는 안 돼
거룩히 지켜야 할 주일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말씀은 기독교인 대부분이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인정하지만, 그에 비해 “주일에 일하지 말라, 물건 사지 말라, 오락하지 말라,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라”(요4:23~24)는 말씀은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일예배를 믿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고, 주일에 오락을 행치 말라고 했는데도 TV 보고 쇼핑하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실상입니다.
주일에 물건을 사고 팔지 말라는 것을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말로 들으면 지나친 이야기이고, 왕의 말씀으로 들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다음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입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신5:12~14)
“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느10:29~31).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58:13~14).
‘여호와의 입의 말’이라는 말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왕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왕의 말씀을 왜 우리 마음대로 거역합니까? 신앙생활은 내가 편한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으로 알아 그 말씀대로 이행하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믿음 있는 자의 신앙생활입니다.
설교 시간을 제한하지 말라
예배 시간에 시계를 들여다보며 “도대체 왜 이렇게 설교가 긴 거야?”라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목사님, 주일 설교 너무 기니까, 조금만 짧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거룩히 지켜야 할 주일에 예배를 일찍 마치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설교 시간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인간의 영육에 필요한 생명을 공급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도덕적인 소리, 윤리적인 소리가 아니고 사람의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역사하는 왕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할 때 어떻게 감히 왕이신 하나님 말씀에 길다 짧다 불평불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많은 교회가 설교 시간에 대한 결정권을 성도나 교회의 전통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의견과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설교 시간을 정하고, 설교하는 목사가 회의에서 결정한 설교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쫓겨나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설교자가 설교를 몇 시간 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설교를 몇 시간 하셨다거나 사도들이 설교를 몇 시간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직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9~12절을 보면 바울이 설교하는데 설교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자 3층에서 졸던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자 살려 놓고 다시 설교를 했습니다. 요즘 시대에 졸다가 떨어져 죽을 만큼 늦게까지 설교를 하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떨어져 죽은 자를 살려 놓고 계속 설교했는데도 한 사람도 먼저 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설교를 바울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기에 시간도 초월하여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왕은 시간에 제한받지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합니다. 어전에서 임금이 말하는데 신하 주제에 “점심 먹고 합시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그 누구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설교 시간을 제한하는 만큼 하나님은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젠가 집회 중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15년 동안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걸어가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밤 8시에 시작한 설교가 새벽 1시를 넘어서까지 계속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만약 앉은뱅이였던 그가 ‘무슨 설교가 이렇게 길어? 할 일도 많은데 그만 가야겠다’라며 설교 도중에 자리를 떴다면 일어나 걸어가는 이적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교 말씀을 자신에게 직접 들려오는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기에 온몸에 힘이 생겨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5년간 앉아만 있다가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일어났을 때 그 충격과 감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이적을 체험한 앉은뱅이처럼 시간의 제약을 초월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구경꾼처럼 시간에 쫓겨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을 원천 봉쇄해야 하겠습니까? 답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5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