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처음부터 잘못 뿌리내리면
믿음 안에 자리지 않고 정체하게 돼
옥토에 뿌리내린 열매가 왕성하게 자라듯
신앙생활도 제한 없이 성장해 하나님의 기쁨 돼야
◆신앙의 뿌리 어디에 내렸는가
크고 오래된 정자나무는 주위의 잡초에 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나무는 주위에 잡초가 많으면 그 영향으로 잘 성장하지 못합니다. 교회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악한 마귀의 방해에 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옥토에서 씨앗이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으면 잘 자라 다른 것에 별로 방해받지 않는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말씀과 생명을 공급받아 잘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키가 매우 작습니다. 뿌리에서 진액을 공급받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름진 땅에서 자란 나무는 비록 어린나무라도 키가 큽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의 뿌리를 잘못 내리면 몇십 년씩 신앙생활 했어도 십일조 한번 못 내고, 새벽기도 한번 못 나옵니다. 그의 삶이 믿음 안에서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처음 왔어도 옥토에 떨어진 씨처럼 하루가 다르게 신앙이 성장합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더는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이 정도면 됐다는 안일한 심정에서 성장해야 할 필요성과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제한이 없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와 적게 맺는 나무를 주인이 똑같이 취급하지 않듯이,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도 그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관심사가 다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되 마음껏 성장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논에서 벼가 익어 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것은 잎이 무성하면서 가운데부터 익어 가는 종자가 있고, 어떤 것은 잎이 밑으로 처지면서 이삭만 무성해 가는 종자가 있습니다. 또 벼의 품종마다 밥맛도 다릅니다. 그러나 농부는 어떤 벼가 되었든지 많은 수확을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곡식을 얻기 원하여 우량 품종을 심습니다.
똑같은 씨를 뿌릴지라도 어떤 것은 크고 아름다운 열매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작고 볼품없는 열매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각자에게 나타나는 열매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이 뿌린 신령한 말씀의 씨가 우리 속에서 잘 자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자라길 원하십니다.
곡식을 거두는 농부도 씨를 뿌려야 하는 봄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데, 더구나 우리는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육신의 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충성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기도할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됩니다. 육신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고 시간이고 기회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육신의 때를 가장 알뜰하고 요긴하게 사용하여 영혼의 때에 최고의 행복과 부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한 가족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노년이 되면 한번쯤은 지난날을 회고합니다. 주님과 관계도, 교회생활을 하면서 성도와 관계도, 또 이웃과 관계도 이 땅에서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회고하는 날이 오는데 그날이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회고할 때 이 땅에서 가장 지혜롭게 살았다고 주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도록, 육신이 있는 동안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따르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정말로 지혜롭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를 바라볼 때 이 성도를 생각하면 저 성도 사정이 딱하고, 저 성도를 생각하면 이 성도 사정이 딱해서 형평성 있게 살 기회를 놓칠 때입니다. 또 먼저 온 성도를 생각하면 충성한 일꾼이니 그 성도가 소외당하지 말아야 하겠고, 또 늦게 온 성도를 생각하면 이제 막 은혜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도 소외당하지 말아야 하니 종종 성도에 대한 형평성 때문에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것을 목사의 진실한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습니다. 목사의 진실한 소원은 각자의 신앙생활에서 유익한 환경을 만들어 하늘나라에서 가장 영광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성도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먼저 온 성도들이 텃세를 부리면 초신자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새로 온 성도가 은혜받아 열심히 충성하면 먼저 온 성도가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고 뒤에서 수군거리는데 이것은 교회 부흥을 가로막는 참으로 무섭고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전통과 역사에 매여 있는 가시덤불 같은 심령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 상태로는 절대로 교회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교회는 그때부터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한 가정에 속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자식들을 사랑하면 그 가정은 티격태격 싸울 일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 불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모두가 주님의 신부로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래된 성도나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성도나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면 교회는 그 사랑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순간 예수의 피로 하나 된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잊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제한받지 않는 신앙생활이 펼쳐지도록 서로를 배려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 기억되는 지혜로운 교회생활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5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