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2-05 17:38:38 ]
직분은 주님의 일을 위함이며
영혼을 살려내기 위함
본문) 고린도전서 9장 16~19절
구역식구·기관회원·전도한 사람이
예배 드리러 안 오면 애가 타야
그 사람이 지옥 가면 안 되기 때문
‘부득불’ 찾아가 교회로 데리고 와야
2020년 회계연도에 임명된 직분자들을 충성스러운 주의 일꾼으로 세우고자 지난해 12월 11일(수)과 13일(금) 예루살렘성전에서 직분자 세미나를 열었다. 직분자 세미나 말씀 마지막 편을 옮긴다.
<사진설명> 윤석전 담임목사가 목숨보다 중요한 직분자의 사명에 대해 말씀을 전하고 있다. 강문구 기자
예수님과 나의 관계는 ‘부득불(不得不, 하지 않을 수 없는)’이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구원받았으니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직분을 맡기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내키지 않아도 마지못해 꼭 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는 직분에 관해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9:17)고 말했습니다. 상(賞)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매 맞고, 헐벗고, 배고파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강(江)의 위험과 강도(強盜)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해도”(고후11:26) 부득불 예수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애가 타서 서신을 보내서라도 바로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득불한 애절한 마음은 누가 주셨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득불한 직분의 자세를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찔리셨기에 내 허물이 해결되고, 주님이 상하셨기에 내 죄악이 해결되고, 주님이 징계받으셨기에 내가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기에 내 질병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잔인하게 피 흘려 죽으셨기에 내 죄가 사함받았고, 그가 죄 없으신 증거로 삼 일 만에 부활하셨기에 그 생명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됐습니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부득불 자기 자신을 내놓고 살 찢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득불’ 베풀어 주신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고, ‘부득불’ 흘리신 피를 방관할 수 없기에 우리도 ‘부득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부득불’ 정신을 가진 직분자를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맡은 직분의 목적은 하나도, 둘도 모두 다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나 타는 불 속에 있는 사람을 보고 살려내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부득불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것과 같이 지옥 갈 영혼을 방관할 수 없어 살려내야만 하는 것이 구령의 열정입니다.
직분자들이여, 영혼 섬기지 않으면 안 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부득불’한 사정이 당신을 일하게 하십시오. 영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부득불 “지옥 가면 안 된다”고 전해야 합니다. 때로는 뺨을 맞아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 사랑입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런 영적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4:24)라고 했으니. 영적 세계를 알아야 ‘부득불’ 해야 하는 간절한 정신과 마음이 나타납니다. 구역식구·기관회원·전도한 사람이 예배드리러 오지 않으면, 안타까워 애가 타야 합니다. 부득불 애가 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사람을 천국 갈 수 있게 인도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려내기 위해서 ‘부득불’ 찾아가서 애원해서라도 교회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게 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이 없는 직분자라면, ‘죽은 자’에게 일감을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육(肉)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불쌍한 환경에 처한 사람의 사정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를 전혀 모르는 인본주의자, 육신의 요구대로 사는 자일뿐입니다.
제 어머니는 예수 믿고 나서 저희 가정에서 절대 우상숭배하지 않고 주일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오랜 세월 아버지께 얼마나 모진 핍박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날 만큼 참혹한 핍박을 받았지만 아버지를 남편이요 가장으로서 깍듯이 섬기셨습니다. 어린 저는 어머니께서 피를 흘리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만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분이 나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아버지가 너무 미워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밉지도 않아요?” 그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제게 타이르듯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야. 아버지가 몰라서 저러시는 것이지 절대로 나를 핍박한다고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버릇없이 대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성경에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돕는 배필(配匹)”로 지음받았습니다(창2:18). 어머니는 그 잔인한 육체의 고통과 핍박을 20여 년이나 받으셨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를 한없이 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또 아버지가 예수 믿고 천국 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언제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끔찍하게 핍박하는 아버지를 미워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제가 한밤중에 자다 깨서 성령에 사로잡혀 애절하게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나이 들어 신앙적으로 철들고 보니 제 눈에도 아버지가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악한 사단 마귀 음부의 권세에 불의의 병기로 사용당하는 모습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본받아 아버지를 위해 진심으로 사랑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수십 년 동안 매를 맞고 고통당하는 무서운 핍박을 받았으나 ‘부득불’ 아버지를 구원해야 된다며 미워하지 않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기도는 결국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머니 앞에 눈물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내가 죽을 죄를 졌소. 내가 예수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교회에서 멋지게 주님 위해 일할 기회가 더 많이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왜 부득불 그렇게 아버지를 끝까지 사랑하셨을까요. 이 사랑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지옥 고통을 면해 주려는 영적 사랑입니다. 지옥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인식되는데 몰라서 핍박하는 남편을 어찌 지옥 가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신앙생활의 수고는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에,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욕을 해도, 무섭게 핍박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야 할 일입니다. 잘한다고 손뼉 쳐 주면 힘내서 하고, 조금 야단치면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의기소침 한다면,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의 자존심을 초월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내가 맡은 직분은 육신의 감정과 자아를 초월하고 육신에 어떠한 손해가 올지라도 죽을지언정 해야 할 일입니다.
‘직분’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서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 자손이요,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그는 율법사요 학문으로는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이어서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기 권한을 다 버리고 복음 증거를 위해서 순교하기까지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이유는 바로 주님이 주신 직분, 예수 전하는 일을 ‘부득불’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피로 값 주고 산 양떼를 잘 지켜야 한다’(행20:28)는 말을 유언처럼 애절하게 남기고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맡긴 영혼을 목숨을 다해 섬겨 부득불 천국 가게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하셨고 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21:15~17)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득불 주님 심정 가지고 영혼을 잘 섬겨야 하고,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샀으니 주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잘 섬겨서 그 영혼 지옥 가지 않도록 부득불 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직분자의 정신입니다. <끝>
/정리 황연희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66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