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3-03-06 16:53:15 ]
주께서 십자가 피의 공로로
내게 먼저 사랑 베푸셨으니
그 은혜를 표현할 길 없어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것
주님께 하는 일은 봉사 아닌
‘충성’이라는 용어 사용해야
직분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순종보다 훨씬 수준 높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 주셨으니, 그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자라면 나도 목숨 바쳐 자원하여 주의 일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
또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주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천하를 얻는 일에도 목숨은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충성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천하보다, 목숨보다 큰 것이 주님 일에 충성하는 일입니다. 직분은 죽도록 충성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가장 귀한 사명입니다. 충성하다가 죽어야 직분을 최고로 아름답게 마감하는 것입니다.
봉사나 헌신이 아닌 충성
요즘 교회에서 봉사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9~10) 말씀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봉사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용하기에는 알맞지 않은 용어입니다.
봉사라는 말은, 저 사람과 나 사이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그저 저 사람을 위해 박애주의 정신으로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그에게 물 한 그릇 얻어먹은 사실이 없고 양말 한 켤레 얻어 신은 사실도 없지만, 그가 어렵고 힘들 때 내가 그를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봉사입니다.
국어사전에도 ‘봉사’라는 말을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단체 또는 국가에 바치는 수고는 봉사라는 말을 사용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하는 일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주님께서는 내가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때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죗값을 완전히 갚아 주셨습니다. 내가 병들어 고통받을 때 주님께서 대신 채찍에 맞으셔서 대신 아프시고 내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어 나를 삼키려 할 때마다 주님께서 성난 병사와 같이 마귀의 손아귀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건져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하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박애주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게 먼저 사랑을 베푸셨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는 일은 봉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일한다는 뜻으로 ‘충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우리는 지옥 갈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주님이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셨으니 그 은혜에 감사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78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