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4-01-10 12:47:03 ]
비록 세상에서는 불행해 보이는
큰 고난과 장애가 있다고 해도
예수라는 큰 축복을 소유하도록
연약한 지체들 섬기려고 더 기도
세상에서 약하고 소외된 제자를 주님 심정으로 품는 스승들이 있다. 발달·지체 장애인을 섬기는 교사들이다. 장애인을 섬기고 그 가족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있는 우리 교회 교회복지부 김은경 교사와 진행한 일문일답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교회복지부 교사로서 지체들을 섬기고 충성하면서 은혜받은 일화도 많을 듯하다
6년 전 교회복지부에 자원해서 교사 임명을 받았지만, 사실 처음에는 회원들을 섬기기가 힘들었다. 담당한 지체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도 잘 몰랐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린 지체들,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는 선배 교사들을 보며 많이 배운 것 같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지만 나를 이 자리에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언젠가 가정 심방을 하며 “자녀의 장애는 부모의 죗값 때문”이라며 자신을 정죄하고 자책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 소경이 누구의 죄로 인함인지 예수님께 물어봤을 때 그 부모가 죄를 범한 탓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또 그 어머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하며 지난날 내 마음을 울린 설교 말씀도 떠올랐다. “사람들은 저를 앞 못 보는 불쌍한 시각장애인으로 여기겠지만, 저는 하나님께 제일 감사한 것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고, 천국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마지막 설교이다.
비록 세상에서는 불행할 수 있는 큰 고난과 장애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는 것 같다. 교회복지부에서 지체들을 섬기면서 내 평생에 가장 우선하고 가장 감사해야 할 진리를 더 깊이 있게 깨닫는다.
■몇 년 전부터 캘리그라피 컵으로 회원들을 섬기고 있다고 들었다
청년회에 회원들을 섬길 당시, 노량진 학원가에 설치한 전도부스에서 캘리그라피(손글씨)를 활용해 전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엽서 한 장에 손 글씨와 수채화 그림으로 성경 말씀을 전하곤 했는데, 전도부스를 찾은 이마다 마음 문을 쉽게 열고 손 글씨 작품을 전달받은 후 무척 좋아하는 모습도 보면서 ‘캘리그라피를 활용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소망이 커졌다. 손 글씨와 그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쁘게 전하고 싶어서 말씀 엽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2017년부터는 우리 교회 연세말씀사에서 엽서 디자인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쓴 말씀 이미지를 청년회 한 부서에서 요청해 전달했더니, 손 글씨가 새겨진 머그컵을 제작하여 부원들에게 나눠 주며 나에게도 전해 주었다. 순간 ‘우리 지체들에게 손 글씨 작품을 컵에 담아 전하면 좋겠다’ 싶어 소망실에서도 생일 선물로 손 글씨 머그컵을 제작하게 되었다. 매해 머그컵에 들어갈 문구를 바꾸는데, 올해 말씀은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이다. 우리 소망실 지체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새해를 시작하며 회원들을 어떻게 섬기겠다는 각오도 한 말씀 부탁드린다
코로나19 기간이 마무리되어 갈 때도 혼자서 교회에 오지 못하다 보니, 우리 교회복지부 지체들은 제일 나중에 교회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무려 3~4년 동안 이어진 코로나19 사태 기간에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영상으로도 예배드리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교회에 다시 나올 수 있을 때 예배드리러 온 지체들을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연약한 만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귀한 지체들이다.
한 해 동안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는 것 같다. 소통하기 어려운 지체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고민할 때도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하나도 없었다. 우리 소망실 지체들을 예배 자리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할 일은 그저 나를 이곳에 세워 주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그들과 함께 있어 줄 뿐이다. 또 우리 지체들이 축복의 통로가 되어 그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하며 가정 심방도 하려고 한다. 이 모든 일을 하실 주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린다.
위 글은 교회신문 <83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