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문제들을 끌어안고
올해 처음 시작된 교회 상담국은 오병희 국장과 전민갑 차장 외 3명의 상담위원들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성도들은 임대차 문제, 교통사고, 형사사건, 현금 거래에서 생긴 문제 등 여러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다.
“상담 받고 기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 힘이 절로 나요. 상담 후에 교회에서 신앙생활까지 잘하게 되었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한 주에 6~7명이 상담국을 찾고 있지만 초기에는 한 주에 20건 이상의 상담이 접수되기도 했다.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이 줄어드니 도리어 기분이 좋아요. 그만큼 우리 성도님들의 문제가 줄어든 것으로 볼 수 있잖아요. 평생 저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웃음)”
사회의 모든 골치 아픈 분쟁들을 처리해야 하는 ‘판사’의 애환이 웃음에 묻어나는 것 같다.
“앞으로 상담국은 우리 교인뿐 아니라 주변 이웃들에게 개방해 전도의 좋은 계기를 마련해나갈 거예요. 법률상담뿐 아니라 법률서류 작성이나 소송절차를 대신해 주는 일, 회계사와 세무사 관련 일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항공우주공학도가 사법고시생으로
1990년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에 입학한 오병희 집사는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와 세상의 원리에 대해 갈급했다. 유물론을 비롯한 철학과 물리학, 문학, 그 어디에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교회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1993년 1월, 오 집사는 여동생의 전도로 연세중앙교회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했다.
“목사님이 ‘기독교는 철학이나 윤리가 아니라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하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후 오 집사는 교회만 와도 좋았다. 주일, 삼일, 매일철야 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렸다. 청년회 편집실에서 3~4년간 충성하던 때는 힘든 줄도 몰랐다. 매주 금요일이면 청년들과 함께 주보를 만들며 밤을 꼬박 새우고, 아르바이트 가는 길에 인쇄를 맡겼다가 20kg 가까이 되는 무거운 인쇄물을 기쁘게 찾아왔다. 대학 4학년이던 오 집사는 진로와 비전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가 가장 큰 화두였어요. 전공을 살려 공과대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원이나 교수를 할 것인지, 1차 시험에 붙었던 변리사 준비를 계속할 것인지 고민했어요. 나중에는 간섭받지 않고 신앙생활 맘껏 할 수 있도록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공대생의 힘든 사법시험 도전이었지만, 97년 1차 합격에 이어 98년 여름 2차에 당당히 합격했다. 성경 인물 중 ‘가이오’와 같이 되어 교회를 마음껏 수종들고 덕을 세우고 싶다는 비전의 길이 열린 것이다.
포기할 건 과감히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이정표를 따라 새로운 진로로 완전히 색다른 인생을 살게 된 오병희 집사는 삶의 진로를 찾는 크리스천들에게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10~20년씩 인생을 길게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나를 만들어 가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의 직업 자체로 영광 받으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저도 크리스천으로서 포기할 건 과감히 포기하고, 신앙의 노선을 지켜 나가려고 노력합니다.”
인터뷰 내내 잔잔하게 전하는 젊은 크리스천 판사의 말에서 굳은 의지와 힘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위 글은 교회신문 <8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