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김영진 장로(국가조찬기도회 초대회장, 제53대 농림부 장관)
나는 평생에 두 번 감옥에 가 보았다. 우리는 한평생을 살면서 명분과 실리 양자택일의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느냐에 대한 선택이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증언하고자 한다.
나는 아주 깊은 산골, 전라남도 강진군 도안면 향촌리 목냉리골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우리 집은 그 지역에서 제일 가난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부모님께서 학비 때문에 내 진학문제를 놓고 다투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러다가 면소재지에서 우연히 우체국장을 보고 나도 모르게 쏜살같이 따라 들어가 취직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우체국장은 “어린 것이 뭘 할 줄 알겠느냐” 했지만 나는 스템프를 찍는 아저씨를 가리키며 “저걸 한번 해보겠다”라고 말한 다음, 마음속으로 ‘스템프를 잘 찍어서 우체국장 마음에 꼭 들게 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스템프를 잘 찍는 모습을 보여 주어 결국 우체국에서 사환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지만 새벽부터 부모님을 따라 새벽기도에 참석했다가 곧장 우체국에 출근해서 연탄불을 피우고 넓은 우체국 대청마루를 다 청소하고 편지까지 배달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다. 동상에 걸려 손톱에 조금만 물체가 스쳐도 피가 터졌다. 하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모든 고통을 참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우체국 앞에 나타날 때였다. 그럴 때면 우체국 뒷편에 있는 컴컴한 연탄 창고로 숨어들었다. 너무도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우체국에 취직도 하고 부모님이 나를 키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일꾼으로 바치겠다고 했는데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감동을 받았다. 그러자 주님의 은혜를 잠시 잊었던 내 자신이 바보스러웠고 주님을 향한 감사의 눈물이 쏟아졌다. 그 후로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일 년 동안 학비를 마련해서 이듬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장성하여 고향에 있는 교회를 섬기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는데 이유 불문하고 이 규칙을 어기면 무조건 유치장에 가야 했다. 그러나 신앙생활 하는 일에는 물론 새벽에도 농사를 돌봐야 하는 농촌에서는 통행금지 제도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과 함께 청원서를 작성해 목사님께 조언을 얻은 다음 국회의장에게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통행금지해제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계엄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특수기관의 지하 감옥에 감금당했다. 네 배후가 누구냐며 모진 고문을 가했지만 “배후는 하나님이다”라는 말로 일관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한 평이 채 안 되는 감옥. 하루 종일 냄새나는 변기통을 앞에 두고 양팔과 두 다리를 제대로 뻗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성경찬송이 너무나 그리웠다. 어느 날 면회 온 아내가 힘들게 넣어준 성경책을 받아들고는 너무나 감사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기도하고 읽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통과 고난 중에 있는 내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고, 그 때 받은 감동과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침내 고향 교회 성도들이 십여 대의 버스를 타고 와서 보름 동안 산기슭에 진을 치고 철야기도를 하며 “김영진 집사는 아무 죄가 없으니 석방시켜 달라”고 데모 아닌 데모를 하자 당국에서 면밀히 조사한 결과 아무 죄도 없다는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이런 작은 고난으로 시작해 1981년도에는 전국에서 통행금지 제도가 해제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 다니면서 교회 일에 열심인 어느 날, 섬기던 교회 목사님께서 부르시더니 “강진 기독교 연합회 목사들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여 농민을 대표하는 일꾼으로 국회에 파송 선교사로 보내기로 했으니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했다. 못한다고 펄쩍 뛰었지만 목사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압도되어 그만 “아멘”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와 맞붙은 상대는 그 지역에서 8년 동안이나 국회의원을 했고 전 대통령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그야말로 ‘강자’였다. 합동연설회 때만 해도 상대편은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내려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엄청난 지지를 해주는 반면,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다가 리어카에 배추를 싣고 온 몇 사람 안 되는 농부들뿐이어서 한눈으로 봐도 상대가 되질 않았다.
아내와 함께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나의 교만함을 회개하며 농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의회의 심부름꾼으로 국회에 보내달라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 지역의 많은 분들의 기도와 목사님들의 기도가 상달되어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카퍼레이드를 받았다. 나를 경운기에 태우고 그 지역의 유권자들과 교회 성도들이 모두 나와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함께 기뻐했으니 말이다.
국회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5선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거치면서 16년 동안 농림해양수산위원회만을 고집하고 있다. 또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터졌을 때 제네바의 GATT본부 앞에 가서 삭발을 하고 물과 소금만을 먹으며 보름 동안 금식 기도하여 농민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쌀시장을 개방하는 결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이것은 농민을 대변하는 일꾼으로 일해주길 바라고 나를 지지해주고 기도해주신 지역민들과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받들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299명 국회의원 중에 기독교인은 156명 가량 된다. 처음 국회에 들어가서 여야를 초월해서 신앙으로 함께 난제를 풀어보고자 국회조찬기도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 후에는 대통령과 삼부요인, 장관 등 국무위원들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국가조찬기도회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초대 회장을 거친 후 작년에 다시 3대 회장직을 맡았다.
어느 날 국회의사당 지하 2층 기도실에 가보니 불도 켜지 않은 채 국회의원 두 분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국민들이 오늘날 국회의 모습을 통해서 많이 실망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는 걸 알고 국회가 여야를 초월해서 겸손히 달라지고 변화되기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한다.
36년 동안 일제의 억압통치하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체제에서도 이 민족은 망하지 않았다. 또한 IMF경제 환란 속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IMF를 극복한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흘린 한국 교계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주님께서 화답하여 주신 결과라고 믿는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강렬한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는 반드시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 뜻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6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