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17> 이덕여 목사

등록날짜 [ 2010-01-25 14:17:41 ]

교단 해체령 속에도 예배 드리며 믿음 지켜

이덕여(李德汝) 목사<사진>는 1897년 9월 7일, 충남 예산군 이정회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한문공부를 끝내기 1년 전인 1910년 마을을 방문한 전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다.
1913년 광천 새터교회에서 성실하게 교회생활을 했던 이덕여는 이영구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고 교회의 임원이 되었다. 그해 9월부터 당회와 사경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광시교회 설립
전도사 직분을 받은 이덕여는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교인들과 함께 광시교회라 이름을 지었다. 광시교회는 이 전도인의 열정적인 기도와 전도의 열기에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신자들이 교회에 모였다.
인근에 있는 마을 주민들도 참여하면서 교회가 비좁았다. 아무리 넓혀도 집에서 시작한 교회가 좁기는 마찬가지였다. 교우들과 힘을 합해 교회를 건축하기로 하고 기도에 힘썼다. 모든 교인들은 성냥을 팔기도 하고 청년들은 돌을 나르기도 했다. 자금이 모아지자 교회를 짓기 시작하여 훨씬 넓은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지어진 교회는 충남 예산 지방의 모교회 역할을 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여러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되었고 신도들은 날마다 더해졌다.

전도대를 이끌며
1930년 10월에 이덕여 전도인은 통장 직분을 받고 예산 구역에서 시무를 관장하였다. 일 년 두세 번 개최되는 당회와 사경회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전도대회를 통해 회개하고 교회에 들어오는 교인들을 모아 교회를 세웠다. 그 해에 원산에서 열린 대화회에서 감로 직분을 받았다. 교회로 돌아온 이 감로는 구역 내의 모든 교회를 돌며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교인들은 이 감로의 말에 순종하여 열심히 전도했다. 이러한 전도를 통해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고 교회에 들어왔다.
전도대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국에 흩어진 교회에 다니며 간증함으로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전도에 힘을 얻고 열심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단 해체령
1942년 9월에 일어났던 원산 침례교단에 대한 탄압은 해방되기 직전에 행해진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침례교단의 모든 교회에 해체령이 내려져 더 이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교회는 문이 굳게 닫혀졌고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겨우 마을의 어느 집에서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 감로 역시 32명의 임원들이 검거될 때 함께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매일같이 심문이 계속되었다. 괴로운 고통의 시간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춥고 캄캄한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세상 삶에 대한 소망은 끊어지고 오직 주님을 향한 믿음의 문만이 하얗게 영혼을 비추고 있었다. 고문은 견딜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기로 매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을 맞았다. 해방된 조국은 자유롭게 찬송을 부르고 자유롭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그동안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덕여 목사는 1950년 전주에 있던 덕상교회에서 시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56년 경북 상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67년 3월 2일 밤 6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리 황연희 기자
자료출처<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7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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