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3-17 09:38:19 ]
9남매 자녀 중 4명 목사로 봉직해
일제 강점기에도 복음의‘씨’뿌려
김석규(金碩奎) 목사는 최초로 울릉도에 복음을 전파했다. 현재 울릉도에 17개 교회, 3000여 신자가 존재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 기독교 사상 보기 드문 오(五) 부자(父子) 목사라는 큰 열매를 맺었다.
김석규 목사는 1891년 3월 11일 경상북도 영천군 내동면 단포동에서 김두건 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인자한 부모 슬하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자랐으며, 당시 우리나라의 풍습대로 어렸을 때 서당에 나가 친구들과 함께 한문을 공부했다.
1913년 부모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1913년 그의 나이 22세에 교회생활을 시작한 김석규는 매일 전도사와 함께 가정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전도에도 힘을 썼다. 1926년 3월 15일 전라남도 해남 출신의 김순이 씨와 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하면서 가정이 안정되었고 믿음 안에 있는 아내를 얻은 그는 교회에 더욱 충성하였다.
온 가족이 울릉도에 정착
우리 민족은 일제가 침탈하여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사회는 날로 혼란해지고 삶은 점점 힘들어졌다. 여기저기에서는 독립을 부르짖는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한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은 하나님이 주신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석규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위의 형인 창규 씨가 17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모험을 시작했다. 약한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은 작은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갔다. 당시 울릉도는 1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육지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일제의 마수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울릉도를 살펴보고 온 형 창규 씨는 부모와 형제 등 가족들과 함께 울릉도로 이사를 했다. 이렇게 해서 울릉도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종교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을 믿든지 믿음이 있는 것은 삶에 평안을 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을 추수를 마친 아버지가 콩 한 가마니를 판 돈을 형 창규 씨에게 쥐어 주며 육지에 나가 종교인을 초청하라고 했다.
창규 씨는 또 다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파도를 헤치고 육지로 나갔는데 닿은 곳이 울진이었다. 이곳에서 원산에 본부를 두고 전도하던 펜윅 선교사가 파송한 김종희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울릉도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고 울릉도에 같이 가자고 간청했다. 김종희 전도사는 쾌히 승낙하고 둘이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울릉도 주민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되었다.
김 전도사는 김석규 집에 살면서 매일 가족들과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렸다. 가족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김석규는 이때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듯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믿음이 깊어졌다. 차츰 주님을 위한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교회 역사상 보기 드문 오 부자(父子) 목사
김 목사의 가정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보기 드문 오 부자 목사의 가정이다. 김석규 목사와 아들들이 모두 목회자(용덕, 용근, 용문, 용도)가 되어 가족이 모두 주님 앞에 헌신하게 된 것이다.
김석규는 젊었을 때 정치에 뜻이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두 번이나 낙선하였다. 이러한 실망 속에서 김석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주님은 그 길을 인도하여 주셨다. 원래 하나님이 택하여 주님 나라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였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한 것이다.
자기의 길을 깨달은 김석규는 주님의 일꾼으로 살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유언을 남기셨고 이 말씀은 가훈이 되었다. 이때부터 기도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시작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충성하던 김석규는 울릉도 최초의 목회자로 안수를 받게 되었다. 김 목사는 개척교회를 위하여 힘썼다. 울릉도민 모두가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개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안정되었고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이 교회를 가득 채웠다.
김석규 목사는 자녀의 신앙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매일 아침 다섯 시가 되면 모두 일어나 찬송을 불렀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9남매 중 4명의 아들인 용덕, 용근, 용문, 용도가 목사가 되었다. 그 외의 자녀는 장로 1명, 안수집사 1명, 딸 3자매는 집사로 교회에 충성하고 있다.
이같이 9남매가 주님의 일꾼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울릉도로 이사한 후 김종희 전도사를 초청하여 신앙교육을 받고 믿음을 가진 이후 그 신앙을 목숨처럼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였다.
1975년 6월 28일 향년 8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긴 김석규 목사는 이 땅에서 복음의 향기로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가꾼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8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