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4-12 07:54:01 ]
일제시대 혹독한 고문에도 꿋꿋이 독립운동
말년에 침례교 총회장 역임 등 교단에 헌신
차광석 목사(사진)는 1897년 3월 14일 차국헌 씨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던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어려서부터 신(新)학문을 공부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집중력 있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는 성격이던 차광석은 어떤 일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다 이루었다.
‘숭실대 전도단’이란 팀을 이끌고 전국적으로 순회하였고 시국강연을 통해 전도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목회와 교육으로 평생을 일관한 그는 언제나 빨강 넥타이를 즐겨 맸다. 그리고 나이 먹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는데 너무도 이 땅에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성장한 차광석은 숭실대학에 입학했다. 학교에 입학한 차광석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운동에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던 차광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때 무자비한 매질을 당해 팔목이 부러지면서 탈골되어 평생 팔을 제대로 못 쓰는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23년 전도자로 소명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주님을 위해 평생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전도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재학 중에 함중노회 소속이던 함경북도 이원교회에 부임하여 목회자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차광석은 학창시절 조선 학생회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가 결성되면서 학생기독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젊은 애국지사들로 민족운동과 복음화운동을 하면서 민족의 독립과 국민 계몽운동을 함께했다.
학교를 졸업한 차광석은 단천교회에서 10년간 사역했다. 이후 웅기교회에서 2년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다가 1937년 그의 나이 40세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LA에 체류하면서 침례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동시에 한인 교회에서 시무했다. 3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1940년에 귀국했다. 1940년 귀국하여 첫 번째 부임지로 영등포장로교회에서 헌신하였고 1943년에 경기노회장에 피선되어 교단에서 일했다.
1947년 삼성장로교회에 부임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제주도로 피난한 차광석 목사는 제주 한나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장로교회를 탈퇴하고 1963년 서울 아현침례교회에 부임하여 사역했다. 1964년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교단에서 봉사했다. 79세까지 목회하다가 1976년 9월 8일, 유족으로 미망인과 6남 1녀와 9인의 손자와 3인의 손녀를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8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