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4-19 08:18:51 ]
일제시대 혹독한 고문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 지켜
6.25전쟁 이후 분열된 교단 통합에 물심양면 지원
김용해(金容海) 목사는 1906년 9월 20일에 전북 익산군 웅포면 송천리에서 김장섭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주에 있는 신흥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내선일체 운동을 벌이면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허용했다. 기독교 선교도 일시적으로 허용하였다.
새로운 문물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김용해 목사는 신문물에 익숙해질 즈음 장마리아의 전도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게 된 김용해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신앙생활은 멈출 수가 없었다. 반대가 심할수록 신앙에 대한 갈증만 더해 갔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며 교회에 봉사하고 있던 차, 1934년 김영관 감목이 원산에서 소집한 제29회 대화회에서 교사로 임명을 받고 지방에 파송되어 순회전도와 목사를 도왔다. 1940년 이종근 감목이 원산에서 소집한 제35회 대화회에서 최성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고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일제 탄압과 투옥생활
그가 목사 안수를 받던 1940년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총독부는 1942년 6월 10일 이종근 감목을 구속하고 그 다음날은 김영관 목사와 전치규 안사를 구속했다. 이렇듯 전국에 있는 교단 목회자를 포함한 지도자들에 대해 구속령을 내렸다.
김용해 목사도 그해 9월 4일 군사검사국에 의해 강경에서 체포되어 원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침례교단 대표 32인의 일원이었던 김용해 목사는 매일 구타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남달리 체구가 작았던 김 목사에게 가해지는 혹독한 고문과 발길질을 견디기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옥중생활로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다. 그런 옥중생활 중에도 기다려지는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일광욕하는 시간이었다. 잠깐이지만 밖에서 쬐는 따스한 햇볕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가혹한 수감생활은 만 2년만인 1944년 5월 15일 20여 명의 대표들과 함께 기소유예로 나올 수 있었다.
교단 재건의 기수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전쟁이 종식되고 우리나라는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다. 36년이란 긴 세월 동안 암흑과도 같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맞이하는 광복의 기쁨을 무엇에 비기랴.
한국 침례교회는 1950년 점촌교회에서 개최된 제40회 총회에서 미국 남침례교와 정식 제휴하기로 하고 이듬해 1951년 부여에 있는 원당교회에서 개최된 제41차 총회를 시점으로 남침례교 선교사들이 많이 내한하여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침례교회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순항을 하고 있는 침례교회의 부흥은 타교단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59년 대전총회와 포항총회가 서로 다른 곳에서 열리면서 교단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그동안 미국 선교부와 연합하여 순조롭게 부흥되던 교단에 검은 구름이 짙게 덮이게 된 것이다. 김용해 목사는 포항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대전총회는 다른 총회장을 선출하고 교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침례 교단의 분열은 교단의 발전에 커다란 저해 요소로 등장했다. 교회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던 것이다.
교단의 분열이 교리가 다르다거나 신조의 문제로 야기되지 않고 당시 교권을 중심으로 한 감정적인 요인이 많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교단은 또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여지도 남겼다. 양측의 실행위원들은 통합만이 교단의 장래와 발전을 위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측 실행위원들은 통합을 이루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면서 힘을 기울였다. 1961년 2월 2일 부산 충무로교회에서 양측 실행위원 연석회의를 갖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김용해 목사는 통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양측에서 서로를 조율하고 노력을 하면서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1966년 실무진이 구성되면서 합동총회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 그 해 분열된 지 10년 만에 합동총회를 열고 교단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김용해 목사는 교단의 숙원이자 그의 소망이던 합동총회를 열면서 교단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합동 총회에서 김용해 목사가 합동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여과기를 잘 수습하면서 교단은 완전히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일선에서 은퇴하여 후진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1971년 12월 10일 미망인과 3남 1녀를 남기고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는 험난한 세월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으로 꿋꿋하게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퍼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8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