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이상적인 교회 꿈꾼 혁신적 목회자

등록날짜 [ 2010-06-07 07:36:40 ]

침례회 회보 창간, 총회장 역임 등 교단 발전 이바지
개혁 주도했으나 끝내 총회가 분열되며 뜻 못 이뤄

민족의 독립을 꿈꾸며 공부에 전념해
장일수 목사는 1913년 5월 26일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에서 장석천 목사의 1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난 장일수는 부모님을 비롯한 온 가족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가족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다. 장일수 가정은 3대째로 내려오는 신앙인의 가정이었다. 할아버지가 전도자의 복음을 듣고 일찍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기독교 가정이었다.

성장하면서 임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6년 침례교단에서는 일제가 세운 학교교육을 중단하자는 결의를 하고 전국 모든 교회에 공문을 전달했다. 결의 내용은 교역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일본인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인 장석천 목사는 아들에게 전주 신흥 중학교를 자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장일수는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 때문에 장석천 목사는 총회의 징계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일수는 하루라도 빨리 공부하여 지역사회와 민중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쳐 계몽운동에 일조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일제 압제에 놓여 있는 우리 민족이 독립하기 위한 지름길은 공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자 장일수는 고향에 야학당을 세워 부인들과 청년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또 학생들과 함께 청년운동을 벌였다.

복음 전도와 목사 안수, 목회 활동
장일수는 1928년 8월 12일 칠산교회에서 노재천 목사 주례로 침례를 받았다. 이후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1946년 9월 교사 직분을 받고 순회하며 유리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해에 교단 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본격적으로 교회를 돌보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1948년 목사 안수를 받고 동아 기독교 총회 산하 성경학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1년 구제위원으로 봉사했으며 인천 시은 중학교와 성애원을 설립하여 교육사업과 전쟁으로 생긴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했다.

1953년 침례회 성경학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부산 침례병원 자문위원도 겸임했다. 침례회 신학교를 창립하는 데 힘을 모은 장일수 목사는 이사장에 취임했다. 침례회 회보를 창간하여 문서 선교에 기여했으며 침례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1965년 제2차 총회장에 추대되어 전국에 있는 교회를 안정적으로 돌보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장 목사는 점촌교회, 공주교회, 인천교회, 부산 범일동교회, 대전 대흥교회, 울릉도 저동교회 등에서 담임목사로 28년간 목회하다가 1972년에 은퇴했다.

교단 개혁을 간절히 원해
장일수 목사는 교단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교단을 힘 있게 발전하도록 하였다.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교단을 혁신적으로 바꾸고자 했던 장일수 목사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앞선 생각은 교단 산하 교회와 지도자들과 의견 충돌을 야기했다. 보수적인 원로 목사들과 의견이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일수 목사는 본격적으로 새롭고 젊은 인물들과 함께 구태의연했던 교단의 정책을 혁신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회자들이 참가하면서 힘을 얻었고 선교부 회원들이 가세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1959년 수습 총회를 열고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려 하였지만 그 계획은 결국 총회 분열로 이어지면서 장일수 목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침례교단 분열로 막을 내렸다.

본의 아니게 분열 총회로 내몰리게 되어 수습할 여지도 없이 순식간에 분열 총회의 두목자로 지목되었다. 아무리 회개하고자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회한의 날들을 보낸 셈이다. 본래 장 목사는 개혁을 원했지 분열을 원한 것은 아니다. 그가 분열을 원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장일수 목사는 의지가 대단히 강한 목회자였다. 그러기에 혁신하고자 하는 외로운 길을 고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속에서는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베풀고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아낌없이 도움을 줄 줄 아는 훈훈한 정도 많은 목회자였다.

1986년 3월 16일 장일수 목사는 군산 자택에서 7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미망인과 슬하에 2남 3녀를 남겼다.

정리 박은주 기자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9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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