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5-18 10:02:34 ]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 지켜
부지런함과 철저한 관리 통해 모범 보여
신성균 목사는 1897년 10월 12일 경북 문경군 점촌읍 점촌 1리에서 신학희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해에 같은 마을에 사는 박음점 양과 결혼하여 일찍 가정을 꾸렸다.
결혼 후에 2년이 되던 1914년 1월 5일 이만기 성도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대한기독교 유곡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25일 이종덕 목사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침례를 받고부터 성경의 진리에 깊이 빠지기 시작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이웃과 친척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교회에서는 신성균을 전도인으로 임명했고 이를 계기로 더욱 열심히 전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의 은혜에 빠진 신성균은 교회생활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문중의 어른들이 그의 상투를 자르며 반대했지만 신성균의 신앙생활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가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큰 은혜로 감싸 안았다. 신성균은 이러한 고난을 통해 더 깊게 주님의 은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서 더욱 담대하고 굳게 서서 고난과 핍박을 헤치고 주님의 사역을 이루어 나갔다.
순회 목사로 전국 누벼
1917년 3월 10일 집을 나와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김용해 편저 『대한기독교사』 31쪽에는 신성균 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에 경상도 점촌 출생인 신성균 목사는 1914년에 입교한 후 성경을 숙독한 끝에 1917년 3월부터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상투까지 베이어 단발로 짚신 감발하고 보따리 한 개 짊어진 그대로 충청도 단양 가철백이 교회를 거쳐 서울, 원산을 돌며 만주 길림성, 임강 구역, 대목송교회까지 도보로 도착할 때 백미와 소금을 짊어지고 가면서 자취하였고, 임강지방에서 전도하다가 간도 종성동 대화회에 참석키 위하여 1400리를 귀리밥 한 그릇으로 조반에서 점심까지 분색하면서 보행하여도 피곤한 줄 몰랐으며 단벌 옷으로 과동하면서 그 어간 로령 땅인 수청, 연추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전도할 때 때로는 강도들의 위협을 받으며 또는 공산당들에게나 독립당에게 신문을 받는 일도 있었다.”
1917년 10월 20일 종성동 대화회에서 전도인의 직분을 받고 러시아 땅에서 21개월 동안 사역했다. 1923년 10월 25일 충청남도 강경교회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교사 직분을 받았다. 이로부터 일 년 후인 1924년 10월 25일 경상북도 울진 행곡교회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평안북도 자성 구역과 중국의 임강구역에서 순회 목사로 사역했다. 넓은 지역의 교회들을 돌보았던 신성균 목사는 하루에 백 리 길을 걸으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와 교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충청북도 제천 구역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경상북도 예천 구역과 포항 구역에서도 사역했다. 이후 평안북도 초선 구역과 평안남도 맹사 구역에서 순회 목사로 사역하면서 교회를 돌보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
1942년 9월 3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신성균 목사는 교역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원산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원산 경찰서에서 교단의 지도자들에게 가한 고문은 가혹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 목사는 함흥 형무소에서 1년 5개월 23일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44년 2월 15일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출옥 후 가정에서 요양하던 중인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었다.
이후 신성균 목사는 1946년부터 1년간 공주 지역, 포항 구역, 예천 구역, 울릉도 구역 등 경상북도 구역에 파송되어 순회 목사로 하나님 앞에 봉사했다. 1957년 4월부터 충청남도 공주 구역 대교회에서 담임으로 목회했다.
1959년 2월에는 충서 구역 구항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했으며 1959년 8월에는 충서 구역 월임교회를 담임했다. 1960년 12월에는 다시 포항 구역으로 내려가 덕전교회에서 사역하다가 1962년 6월에는 충서 구역 황산교회에 파송되어 목회하다가 1965년 11월에 은퇴하였다.
신성균 목사에게 목회 사역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었다. 일생 소박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았고 손에는 메모지가 24시간 들려 있어 생각나는 것과 새로 알게 된 지식과 기도제목을 메모하여 조금도 빈틈없는 삶을 살면서 그와 함께 신앙생활 하던 교인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를 남겼다.
1982년 10월 29일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후, 1985년 12월 2일 오후 4시 30분 한 해가 기우는 길목에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9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