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 서울침례교회를 개척하며 교단 중흥에 앞장

등록날짜 [ 2010-06-28 23:30:53 ]

펜윅 선교사의 양아들로 영어에 능통… 교단 기초 세워
1950년대 다섯 번 총회장 역임하며 폐허된 교회 재건

안대벽(安大闢) 목사는 1894년 1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안대벽 목사가 출생하기 전, 1890년 침례교회 초대 선교사인 펜윅 선교사가 그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펜윅 선교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안대벽이 14세가 되던 1908년, 어머니는 원산에 있는 펜윅 선교사를 찾아가 아들을 맡겼다. 펜윅 선교사는 안대벽을 양아들로 삼고 그를 양육했다. 당시 신학문을 배우는 것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안대벽이 펜윅 선교사에게 성경을 배우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업 수완도 남달라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원산에서 사업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으나 광복의 기쁨은 잠깐,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자 북한에는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사유재산권이 박탈되었다. 안대벽도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겼다. 또한 신앙의 자유조차 어려워지자 1946년 가족들과 함께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한 안대벽은 생활에 안정을 찾자 그해 9월 충무로에 있는 자신의 집에 교회를 개척했다. 이 교회가 지금 충무로에 있는 서울교회다. 당시 남한의 교회들은 국가 재건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회 질서를 유지할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광복 직후였기 때문에 교회 목회자들이 청년들을 모으고 지방 유지들과 함께 치안을 담당했다.

1950년 목사 안수를 받은 안대벽은 교단에서 일했다. 미국 남침례교 외국선교부와 제휴를 맺을 때 지도자로 큰 역할을 했다. 안대벽 목사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는데 이것은 펜윅 선교사와 생활하면서 배웠기 때문이며 이러한 언어구사 능력이 주님 앞에 아름답게 쓰였던 것이다.

안 목사 부부는 대인관계가 원만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과 친분을 가지고 지냈는데 이때 주요한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안대벽 목사는 교단에서 대외적인 일을 맡았다. 6.25전쟁 때 필리핀으로 피난 갔던 애버내티 선교사가 9.28 수복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경상남도 도지사를 움직여 성사하였다. 또한 부산시 충무로에 있던 건물을 국방부 장관에게 청하여 교회와 병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인천 성애원과 시은중학교 건물, 대전 중동에 일본인들이 쓰다 버리고 간 건물들을 사들여 신학교를 만들기도 했다. 서울시 동자동에 있던 건물을 매입하여 총회 사무실로 쓰도록 했다. 안대벽 목사는 1952년부터 교단 총회장을 맡아 봉사하였는데 이후 53년, 57년, 62년 등 다섯 번이나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6.25로 폐허가 된 교회와 교단을 중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대벽 목사는 과도기에 처했던 침례 교단을 전쟁의 페허로부터 복구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지도자였다. 이러한 그의 지도력은 전국의 교회들이 순조롭게 복구되어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이후 1970년대부터 시작한 놀라운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침례 교단의 훌륭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주님의 사역에 헌신적으로 드렸던 안대벽 목사는 1987년 93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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