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7-04 20:53:53 ]
침례신학대학 제3대 학장으로 교역자 양성 주력
교육가이며 탁월한 행정가, 복음 전도에도 매진
지대명 선교사(본명 A. Gamage)는 1929년 9월 3일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8세 때 목사인 조부에게서 구원의 도를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 1951년 플로리다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55년 미국 골든 게이트 침례신학교에서 신학사 학위를, 58년 동 신학교 신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에는 미국 남침례신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 몸이 아파 온종일 꼼짝도 못하고 집에서 누워 지냈다. 강의도 듣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 선교사로 소명을 주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지대명은 재학 중에 선교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선교회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아시아 지역에 관심이 생겼다.
신학교를 졸업하자 해외선교부에 아시아 지역 선교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해외선교부는 마침 한국의 신학교에서 강의할 자격이 있는 선교사를 물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대명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기로 했다.
1958년 선교사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왔다. 이듬해인 1959년 침례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하기 시작했다. 1965년 학생들을 가르치던 지대명 선교사는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로부터 8년 후인 1973년 문교부로부터 침례신학대학으로 4년제 인가를 받아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지 학장은 한국교회의 교리에 많은 관심을 두고 신학적으로 잘 정돈한 교리를 정립하고자 힘을 쏟았다. 이러한 교리의 정립을 통해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면 교역자를 양성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학장으로 일하면서도 선교사 본연의 자세인 복음 전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특히 지대명 선교사는 교도소에 수용한 죄수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과 인연을 맺고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몸이 약해 한국에 온 지 8년째인 1966년 악성관절염이 발생했다. 치료를 받았지만 날이 갈수록 몸은 점점 더 나빠졌다. 간호대학을 졸업한 부인 네티 선교사의 간호와 치료를 받았지만 완치하지 못했다. 지병으로 고생하던 지대명 선교사는 한국 선교를 끝내고 1979년 필리핀으로 요양 차 떠났다.
지대명 학장은 학교의 업무를 혼자 하는 법이 없었다. 모든 일을 직원들과 의논해서 결정했다. 지대명 학장은 영국계 미국인으로 신사였고 또한 훌륭한 교육가이자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일할 때는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매사에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또 준법정신도 투철해서 학교에서 어떤 규칙이나 법을 정하면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철저하게 지켰다.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부드러운 심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때론 냉철하기도 했다. 지대명 선교사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가족과 약속을 하면 우선순위로 지켰고, 가족들을 존중했다. 부인과는 동료 이상으로 친근하고 자녀들에게 친구 같은 훌륭한 아버지였다.
지대명 선교사는 건강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학교를 돌보고 있을 즈음 학교 확장을 위한 장기 계획을 세웠다. 모든 교수와 교단 관계자들까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학교를 이전하고 미래를 대비하여 대학의 면모를 갖추기로 한 것이다. 몸이 건강하지 못한 지대명 선교사는 학교를 한국인들이 당연히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운영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했다.
모든 경영권을 이양하고 나자 한국에서 본인에게 맡긴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더는 한국에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기후 조건이 좋은 필리핀으로 출국하면서 한국에서 해오던 하나님의 일을 모두 마쳤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9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