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7-13 08:16:45 ]
펜윅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침례교단에 정착
복음적 성경관 세우며 인품에서도 인정받아
이원균 목사는 1887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이 목사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청년기에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경성신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결교단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사역하기도 했으며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평양신학에서 공부하고 장로교 함남노회에서 사역했다. 일찍이 펜윅 선교사와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그립던 침례교단에서 일하게 된 것은 1955년부터였다. 침례교단에 정착하여 여생을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이원균 목사는 복음적 성경관이 정립된 주경신학자로 복음의 진리를 후진들에게 전승하고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은 하나님의 일꾼이다.
침례교단으로 이적
이원균 목사는 청년기에 이르렀을 무렵에 복음을 듣고 교회를 다녔다.
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신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평안북도 방현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수도 동경의 나까와시마교회 목사로 시무했으며 일본YMCA 위원장으로도 일했다. 또 평양신학교 이사장과 예수교 장로회 함남 노회장을 역임했다.
1955년 침례교로 이적해, 부산 충무로침례교회를 담임하면서 우리 교단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 교단 총회에서 교육부장으로 교단일을 시작한 이후 1965년에도 교육부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1969년에는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위해 봉사했으며 1970년 총회장으로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로 주님을 위해 헌신했다.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가졌던 이원균 목사는 1962년 대한침례신학교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6년에는 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펜윅 선교사와의 인연
이원균 목사는 여러 교단에서 공부하며 신학을 연구하였으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각 교단에서 내세우는 교리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많았다. 이러한 신학 문제에 대해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이원균 목사는 금강산에 들어가 금식하고 기도를 했다. 이 사실을 안 침례교단 한기춘 목사는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이원균 목사에게 보냈다. 편지에는 “여기 참 복음이 있으니 속히 하산하고 그를 만나시오. 세계적인 주경학자 미국 고든 박사의 문하생인 펜윅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위하여 와 있소”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이원균 목사는 산에서 내려와 펜윅 선교사를 만났는데 함께 성경에 대한 교리를 토론했다. 이때 고민하던 의문점들이 하나씩 풀려지면서 가슴이 후련해졌다. 이때의 경험과 자신의 연구한 성경적인 지식들을 모아 <율법과 복음>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을 추천한 채필근 목사는 “하나님의 예정과 사람의 자유와 같은 문제, 믿음과 행함에 관한 문제, 예수님의 재림, 끝날 심판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나의 옛 친구 이원균 목사는 오랫동안 목회생활과 성경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 위대한 진리를 깨달아 ‘율법과 복음’의 미묘한 관계를 똑바로 붙잡고 방황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이 책을 썼다”라고 소개하였다.
이원균 목사는 펜윅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배웠던 때를 항상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에 침례교단에 몸을 담고 사역하기를 원했다. 1955년에 이원균 목사는 침례교단으로 교단을 옮겼다. 일찍 펜윅 선교사와의 친분을 통해 인연을 맺고 있었던 터여서 침례 교단으로 옮겨 오자 자기 집에 들어온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적극적인 성품과 인품
이원균 목사는 건장한 체구와 강한 체력을 갖췄다. 더구나 학문에도 열정적이어서 지적인 갈증을 느끼고 항상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전진했다. 침례교단에 들어와서는 누구보다도 짧은 시간에 교단 총회장으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적극적인 성품과 인품이 교단의 모든 교역자들 사이에서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원균 목사는 은퇴한 후에도 줄곧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평생 동안 이룬 신학적인 성과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69년 12월 6일 향년 82세의 일기로 미망인과 슬하에 2남을 남기고 하나님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20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