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9-07 21:19:40 ]
전쟁으로 폐허된 한국 국토와 국민 보며
부인과 함께 복음 전하며 이웃 사랑 실천
최희준 선교사는 1957년 예일대학에서 한국어를 수학했으며 그해 10월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도착해서 1958년부터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60년 미남침례회 한국 선교부 재무부장을 역임했으며 1963년 침례교 교회 행정과 출판부장으로 봉사했다. 또 1973년에는 선교부 북부지역 전도부장을 겸해서 한북지방 협동 선교사로 사역했다.
한편 최 선교사의 부인인 최희신(Juanita Ann Johns)선교사는 1956년 텍사스 휘트니스 서남 침례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최희준 선교사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958년 침례신학대학교 교수로 한국에서의 사역을 시작했으며 1959년에는 서울교회 장년성가대 지휘를 맡아 봉사했으며 피아노를 개인 지도하는 등 교육에 힘썼다. 1968년에는 서울 외국어학교 밴드부를 맡아 봉사했으며 1974년 연세대학교 강사 겸 교회진흥원 음악부 협동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서울교회 샤론 합창단과 어머니 합창단을 맡아 봉사했다.
선교로 지원한 동기
선교사로 사명을 받기 전에 최희준 선교사는 미국에서 목회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님과 깊은 기도를 하면서 평안하기를 원했던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깨닫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1946년부터 2년간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7사단 군악대에서 근무했는데 이것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섭리였다.
최희준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을 무렵은 6.25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져 민중들이 극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본 최희준 선교사는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손에는 구호의 손길을 병행해야 했다.
최희준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한국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폐허 속에서 몸부림치는 한국인들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아낌없이 펼쳤다. 한국인들은 그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했다. 겸손하고 사랑이 풍성한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작은 예수’라고 불렀다. 최희준 선교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를 가득 남겨 놓은 것이다.
영예로운 은퇴
1957년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993년까지 37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잘 감당하고 영예롭게 은퇴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한국의 민중들에게 바쳤다. 선교사역에 충성한 그들은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고국을 떠나올 때 가장 마음에 깊이 남았던 건 부모님이었다.
“선교사 임명을 받고 고국을 떠나올 때 자식 된 자로서 부모님에게 효도도 못하고 이별하고 돌아섰을 때 가장 섭섭했는데 이제 37년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한국의 사랑하는 형제들을 두고 이 땅을 떠나는 나의 마음은 더욱 섭섭하다”고 그때의 심정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91세의 아버님과 89세의 어머님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라도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필자와 함께 일했던 최 선교사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으로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필자가 만난 그리스도의 사역자 중 가장 성실하게 살면서 모든 사람의 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또 최희준 선교사는 한국 침례교단과 미남침례교 해외선교회와 제휴한 이래 상호 간의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최희준 선교사는 어려운 시기에 한국 침례교회의 부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데 초석을 다진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끝>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20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