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8-25 07:22:59 ]
모태신앙으로 침례교단에서 자라고 부흥 일궈
훌륭했던 목회 사역의 기초는 어머니의 기도
신혁균 목사는 1905년 5월 5일 경상북도 문경군 호서 남면 유곡리에서 아버지 신치희(申致熙)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혁균을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했다.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나 5세 때부터 유곡침례교회 유치부에 출석하여 하나님 말씀을 배웠다.
1911년부터 서당에 나가 6년간 한문을 공부했으나 교회생활에는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9세 되던 1914년에 신앙고백을 하고 침례문답에 최연소로 합격하였으며 1914년 8월 13일 점촌교회에서 이종덕 목사 주례로 침례를 받았다.
2년 뒤인 1916년 11세 어린 나이에 전도 사명을 받고 12세 때 전도인들 대열에 동행하여 전도지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전도하고 거리에서도 전도했다. 이렇게 4년여 동안 전도에 헌신했다. 이러한 소문은 많은 교회에 알려졌다. 신혁균은 침례교회 교인들에게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으로 알려졌다.
신혁균은 이종덕 목사의 장녀 이옥분(李玉粉) 양과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1926년부터 침례 교단에서 운영하던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만주 이민 길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날로 그 강도가 높아졌다. 사회는 날로 흉흉해지고 민심은 사나워졌다. 이러한 정국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은 조국을 등지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신혁균 가정도 국내에서 신앙생활하기 어려워지자 만주에 이민을 갔다. 오랜 여행 끝에 만주 봉황성에 정착해 봉황성침례교회에 출석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믿음을 키웠다.
신혁균은 1938년 봉황성교회에서 감로 안수를 받았다. 봉황성교회가 운영난에 빠지자 신혁균은 경작조합에 취직하여 회사원으로 생활하면서 교회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신 감로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왔다. 함께 귀국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연고지를 찾아갔다. 신 감로도 가족들과 함께 충청남도 광천에 정착했다. 첫해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목사의 사역
1948년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신혁균 목사는 주님의 일에 더욱 헌신했다. 먼저 그 지역에 있었던 교회들인 담산, 화계, 광시, 예산교회들과 연합하여 지역 발전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52년 그동안 개척한 죽림, 월림, 주포, 홍원, 화안 교회들을 모아 충서지방회를 조직하고 초대 지방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6.25전쟁 이후 교단을 재건하는 일에 힘썼으며 미 남침례교와 제휴 이후 제반 일을 주관하면서 많은 일을 하였다. 신 목사는 중국어가 능통했고 마침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애버내티 선교사와 의사가 잘 통하면서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 목사는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신임이 두터웠다. 첫인상이 좋을 뿐 아니라 마음도 겸손하여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넓었다. 그래서 때론 일을 처리하면서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교회와 교단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신혁균 목사는 1954년 침례신학교 이사장에 취임하고 동년에 교단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전쟁의 페허에서 허덕이던 전국 침례교회들을 복구하면서 부흥할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하였다. 1958년에도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교단 발전에 크게 헌신했다.
목회의 대를 이룬 기쁨
신혁균 목사는 평소 “나는 아들이 셋이나 있지만 목사가 되려고 하는 아들이 없다”며 아쉬움을 드러내며 기도하였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다. 미국에 가 있던 두 아들인 석태와 석환이 목사가 된 것이다. 이때 신혁균 목사는 이보다 더욱 큰 기쁨은 없었다고 간증하곤 했다.
신혁균 목사가 휼륭한 목회자로 하나님의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90세이던 이월규 여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단정하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자녀에게 항상 교육적인 말을 많이 하셨는데 특히 “사람이란 덕이 있어야 한다”고 믿음에 덕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혁균 목사는 자신이 개척한 광천교회에서 30년간 목회했다. 은퇴한 후에는 자녀가 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보냈다. 1982년 4월 21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편안히 잠들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과 3남 3녀 외에 많은 후손이 있다.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20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