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30>] 이덕상 목사

등록날짜 [ 2010-07-19 23:02:52 ]

굶주림과 추위도 이기며 자비량 선교 감당
일제 탄압 속에서도 순교의 정신으로 맞서

이덕상(李德相) 목사는 1889년 4월 25일 경북 상주에서 이연우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잣집 귀공자인 이덕상은 부모는 물론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랐기 때문인지 이덕상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좋아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술에 찌들어 살았다. 방탕한 생활을 접고 술을 끊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 술을 끊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교회를 찾아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복음을 접할 기회가 없던 이덕상은 늘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간절히 찾으며 하나님 만나
그러나 하나님은 간절히 자신을 찾는 자를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왔다. 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들은 이덕상은 가정에서 몇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후 고향 마을에서 60리나 떨어진 점촌교회에 걸어가서 예배를 드렸다. 주일이면 새벽에 집을 나와 교회로 향했다. 4시간 이상을 걸어 교회에 도착했다. 예배를 드리고 집에 오면 하루해가 다 지나곤 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주님을 섬기는 믿음생활은 한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이렇게 교회생활을 시작한 이덕상은 점촌교회 근처로 이사했다. 교회 가까이 이사한 이덕상은 교회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였다. 지금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살아온 그에게는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고 사실 교회생활은 보람 있고 값진 것이었다.

얼마 지나자 자비량으로 전도하려고 인근 마을은 물론 타지방까지 순회 전도하러 다녔다. 이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성경을 더 공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원산으로 가서 펜윅 선교사가 하는 성경공부반에서 성경공부와 전도훈련을 받았다.

1933년 전도인으로 사명을 받은 이덕상은 평안북도 초산지방으로 파송되었다. 문규석 교사와 함께 이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가 섬기는 교회는 부흥하였다.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전도 여행은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워낙 넓은 지역이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며칠을 걸어도 마을이 보이지 않고 눈보라 치는 허허벌판을 한없이 헤매고 다니다 보면 엄습하는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야 했는데 이것은 목숨을 담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교비를 지원하는 곳이 없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들은 자비량으로 사역했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마을과 교회에서 음식을 약간 받았다. 몇 달씩 이곳저곳을 헤매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배가 고프면 솔잎을 따 먹기도 하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몇 달씩 여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전도인으로 사역한 대부분의 성도가 겪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복음 전하는 일을 그만두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일본 탄압에 순교정신으로 맞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처음에는 승승장구했으나 미국의 공세가 점차 강해지자 전세(戰勢)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 아래 있던 우리나라에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다. 농민들이 일 년간 힘들여 지은 쌀을 모두 공출로 빼앗아 갔고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터로 잡혀갔다. 심지어는 교회 종까지 떼어갔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하여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고 한국말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말을 쓰도록 했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잡혀가 가혹한 고문을 받거나 총살을 당했다. 침례교회는 일제 탄압에 순교정신으로 맞섰다. 일제는 침례교단을 해체하고 교회를 폐회했다. 그때 신앙의 지조를 지킨 이덕상은 감옥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념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옥중생활을 하던 중에 1944년 5월 15일 기소유예 교역자 23명과 함께 감옥에서 나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면서 무너진 교회들이 재건되었다. 교회가 재건되면서 교역자들이 필요했다. 이덕상 목사는 1953년 경북지방 수평교회에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이후 마성교회에서 사역했고, 1958년 목사 안수를 받고 울릉도 지방에서 2년간 목회하다가 은퇴했다.

이덕상 목사는 주님의 은혜로 산 보기 드문 목회자였다.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5대 독자 이희조 목사를 비롯하여 사위 3명이 목회자로 하나님 앞에 사역했다. 안재민 목사를 비롯하여 후손들이 전국에서 교회를 섬기며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 1961년 6월 28일 72세를 일기(一期)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 품에 고이 안겼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20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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