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8-17 07:36:49 ]
순교자의 아들로서 신앙의 모범 보여
복음의 순수한 진리 알리며 교단 지켜
김장배 목사는 그 누구보다 교단을 사랑한 목회자였다. 부모가 섬기고 일을 하다 순교한 교단이므로 더욱 애착심이 강했던 것 같다. 교단의 일이라면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동료 간에도 언제나 다정다감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국 침례교회의 산 증인들』이란 책을 저술하여 남겼다.
부모의 신앙 본받아
김장배 목사는 1916년 7월 21일 충남 부여군 임천면 두곡면에서 김희서 교사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이종덕 목사의 주례로 침례를 받은 김장배는 1935년 칠산에 있던 교회에서 반장(현 집사) 직분을 받고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구역으로 순회전도사로 사역했다.
1952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충청남도 원당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1954년 이리교회, 1957년 창리교회에서 2년 동안 일했고, 그 후 점촌교회에서 목회했다. 이후 여러 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59년과 1960년 두 번 교단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에서도 봉사했다. 일생을 침례교단을 위해 헌신하던 김장배 목사는 1981년 『한국 침례교회의 산 증인들』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를 주관해온 산 증인들의 사역을 정리하여 출판했다.
김장배 목사의 아버지 김희서 교사는 그가 학문하는 선비로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게 했다고 한다. 1895년 그의 아버지 김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도자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하다가 교사 직분을 받았다. 1918년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되어 배를 타고 보시엘해 모커 지점을 지나던 중 풍랑을 만나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이로 인해 연약하기 짝이 없던 김장배 목사의 어머니는 김희서 교사가 남겨 놓은 4남 2녀를 홀로 키웠다. 손이 부르트도록 길쌈을 하고 삯 빨래를 하면서 생계비를 벌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자녀 중 한 명이 믿음이 없는 사람과 결혼한 것을 알게 된 교회에서는 그의 어머니를 징계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순종하고 근신했다. 이러한 그의 깊은 신앙심은 자녀들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김장배 목사는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과 하나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김장배 목사의 큰형 김연배 감로는 1942년 일제의 박해로 교단의 지도자 32명이 옥고를 치를 때 함께했던 신앙인이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에서 김장배 목사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순수한 복음의 진리 지켜
우리 교단 믿음의 선배들은 피와 목숨을 바쳐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지켜왔다. 그러므로 우리 후진들도 이를 수호해야 한다고 버릇처럼 교단 자랑을 했던 김장배 목사는 누구보다 침례교단을 사랑했다. 교단이 분열되는 큰 슬픔이 발생하자 “비록 우리 교단이 작은 교단이기는 하지만 자부심과 의지가 대단했던 선배들처럼 오늘 우리도 긍지를 가지고 선배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후배들이 되자. 각 교회 형제자매들이여 총회로 돌아오라”고 역설하며 개인 명의의 성명서를 전국 교회에 보내어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김장배 목사는 언제나 정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어 구사력이 풍부해 설교를 잘했다. 그의 설교는 청산유수와 같이 부드럽고 강했으며 진리가 듬뿍 배어 넘쳤다. 또한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정의감이 투철한 믿음의 선배였다. 그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가득 남기고 1993년 7월 5일 향년 7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으며 서울 연세중앙교회(윤석전 목사는 김장배 목사의 조카 사위다)에서 장례예배를 드렸다.
위 글은 교회신문 <20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