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2-22 13:35:21 ]
동학군에 맞서 마을 전체 보호한 일에 감탄
일찍 세상 떠났지만 그 영향력은 계속 남아
소래를 두 번째로 떠난 뒤 동해안 원산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곳에는 아직 프로테스탄트 선교부가 설치되지 않았다. 원산에서 사역을 마치고 6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내가 한국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한 황해도 소래를 찾아가 보았다.
그동안 노바스코샤(캐나다)에서 온 매켄지 선생이 그곳에서 1년가량 지내며 내가 살던 집에서 살았는데, 아마 정원이 고향 냄새를 물씬 풍겼으리라 믿는다. 중국 의화단(義和團)과 마찬가지로 청일 전쟁을 틈타 한국에서 일어난 ‘동학군(東學軍)’이라는 두려운 집단은 소래 사람들에게 큰 불안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을 일하실 기회로 삼으셨음이 훗날 입증되었다.
매켄지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물건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해올 만큼 큰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은 그의 집 둘레에 가득 쌓였고, 그는 그 위에 영국기와 자신이 고안한 깃발-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을 꽂았다. 그 이래로 이 깃발은 한국 전역에 기독교 교회를 상징하는 깃발로 알려졌다.
‘동학군’이 매켄지 선생을 죽이고 그를 감싼 마을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려고 몰려온다는 소문이 여러 번 들렸다. 그러나 매켄지 선생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 마침내 그들의 병영을 찾아갔다. 이 반란군들과 조용하고 온화한 대화를 나눈 끝에 백인과 기독교 선교에 대한 악감정을 몰아냈다. 이 선교사에게 위탁한 재산들이 그대로 보호되었고, 매켄지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뜻으로 내놓은 선물의 한도 내에서 소래 지역에서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겪은 뒤 매켄지 선생은 안타깝게도 전염병에 걸려 하늘의 상급을 받으러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잡초를 뽑고 있을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씨를 뿌렸고 자신은 그 소산을 거둘 뿐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그 큰 풍채를 여간해서는 놀려두는 법이 없었다고들 했다. 그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그가 잠들자 주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했고, 아주 큰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고결한 사람! 그는 살아서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고, 자기의 헌신이 보상받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으나, 남아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희생에 내리신 풍성한 보상을 지켜보고 있다.
매켄지 선생이 죽고 이듬해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캐나다에서 원산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던 때라 원산에 주둔한 일본군 기지를 일본군 초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내 숙소로 가려면 일본군 기지 곁을 지나가야만 했다. 내가 타고 온 증기선은 군수물자들을 적재한 배로서 뭍에서 5㎞ 밖에 정박했기 때문에, 나는 새벽 3시에 우편선을 타고 뭍으로 향했다. 우편물 담당자와 면식이 있는 덕택에 총에 맞지 않고 시내로 들어갔다. 기지 근처 초소를 지나기란 더욱 위험했다. “정지!” 하고 외치면서 즉시 총을 겨누던 초병들은 내가 일본어로 원산 거주자임을 설명하자 총을 거두고 통과시켜 주었다. 칠흑같이 캄캄한 새벽이었다.
소래에 다시 가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겨울 전에 맞춰 가기란 불가능했다. 원산에는 성탄절쯤이면 대개 눈이 내렸고, 따라서 눈이 내리기 전에 산맥 서편 기슭에 도착하든가 아니면 눈신을 신고 산을 넘든가 해야 했다. 한국 사람들은 15㎝가량인 버들가지들을 사슴 가죽끈으로 엮은, 지름 30㎝가량 되는 둥그런 눈신을 신는다. 깊은 눈을 헤치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고생을 면하려면 원산에서 성탄절 만찬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수해야 한다.
소래로 돌아가는 길 도중 우리는 어느 산중 마을에 머물렀다. 과거에는 예수 이름이 한 번도 선포된 적이 없던 그곳에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아들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를 만났다. 그곳에서 천사들도 부러워할 만큼 구속받은 사람들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2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