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9-17 09:30:20 ]
강대국 간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한 탁월한 승부수
<사진설명>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도중 이승만을 지지하는 군중들이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승만이 정치 생명까지 위태로워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단정론)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만을 비판하는 정치 세력이나 연구자들은 남한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 권력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통일 한국의 대통령에 올라서기 어려울 바에야, 조국을 반으로 나누어서라도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다는 주장이다.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상식적으로 정치적으로 고립해서는 권력을 창출하지 못한다. 권력욕이 강한 자는 권력을 잡으려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극심하게 고립하고 정치 생명에 위협을 받아가면서까지 남한 단정론을 주장한 일은 권력욕 때문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무도 공식적으로 공산당을 비판하지 않을 때, 이승만이 공산당을 공개 비판하여 고립되는 위기를 자초한 일이 권력욕 때문이 아니었던 점과 같다. 이승만은 북한 지역에 이미 공산 정권이 세워져 ‘민주 개혁’이란 이름으로 사회주의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을 직시했다.
그런 가운데 남한에서는 성공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는 미소 공동위원회의 합의만을 기다렸다. 이처럼 지지부진하게 정부를 수립하지 않은 상태를 지속할 경우, 남한 지역에 엄청난 위험이 닥쳐올 것은 자명했다. 아무 대책 없이 미국과 소련이 합의하길 기다리다 보면, 무정부적인 혼란이 가중되고 남한마저 공산화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는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우리나라가 또다시 소련의 노예가 되는 것을 뜻했다.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게 막고자 이승만은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며 정치 생명을 걸고 단정론을 주장했다.
동시에 이승만은 남한 지역 내 ‘정치적 미해결 상태’가 이어질 경우, 미국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 이익을 지키려고 한국을 흥정 대상으로 삼아서 희생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제법 학자이고 수십 년간 망명 정부 수반으로서 강대국들의 멸시를 받으며 외교 활동에 매진해 온 이승만 박사만이 할 수 있는 통찰력이었다.
과연 이승만의 판단이 맞았을까? 미국은 1945년 마지막 3~4개월간 다른 지역 정책을 관철하려고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인상을 준다. 거칠게 표현하면, 한국을 넘기는 대신 다른 곳을 받는 식이다.
소련은 일본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대신, 피점령 통치는 그 지역을 군사 점령한 국가에게 전권을 맡기는 원칙을 고수한 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초안을 대폭으로 수용하는 대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미국 주장에 소련이 양보하기를 기대한 점, 북한 지역에서 단독정부인 임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도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은 점 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다.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단독정부수립론은 우리나라가 공산화해서도 안 되고, 강대국 간의 흥정과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며, 오직 자주독립국가로 세워져야 한다는 이승만 필생의 신념이 탁월한 정세 판단을 통해서 드러난 승부수였다.
오늘날에도 이승만의 단정론에 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이는 곧 대한민국 건국 평가와 연결된다. 단정론이 현실화해서 건국한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우리의 건국이 민족의 영토를 분단했다는 듯 비난한다. 그러나 수많은 증거가 입증하듯이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지령과 소련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분단은 일찌감치 결정된 사건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혹은 대한민국 건국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되는 일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건국이 분단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건국의 지향점은 어디까지나 통일이었다. 궁극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자유 민주주의적으로 통일하려는 지리적 토대, 곧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건국은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의 측면에서 보면 민족을 분단한 것이겠으나, 자유 민주적 통일을 희구하는 세력의 측면에서 보면 민족 통일을 위한 필수적 조치다.
대한민국 수립은 시급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는 주권을 가진 정부가 없었기에 40년간 세계 각국에서 그리고 각종 국제회의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선전하고 청원하며 다녀야 했고, 자치능력이 없는 망국노(亡國奴, 나라가 망하여 침략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국민)라는 경멸과 매도를 감수했다. 건국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였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5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