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40)] 백성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등록날짜 [ 2013-11-12 15:52:02 ]

학교는 사람을 만들며 동시에 나라를 만드는 곳


<사진설명> 교육자치제 실시 1주년 기념 매스게임(1957년 10월 3일). 1950년에 실시된 의무교육제 덕분에 1950년대 문맹이 거의 사라지게 되는 혁명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만은 일평생 교육자였다. 한성 감옥에 있을 때부터 교육 경험을 쌓았다. 각종 범죄를 저질러 갇힌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역사와 신앙을 가르쳤다. 주변 성인 죄수들은 모두 비웃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학생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 역시 배우기를 자청했다. 이승만의 ‘한성 감옥학교’는 외국에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쓴 수많은 글은 교육과 개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미국에 특사로 파견되기 전 짧은 기간 역시 교육에 몰두했다. 이승만은 나라가 발전하려면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우쳐야 하고, 백성이 깨우치려면 교육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다.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곳인 동시에 나라를 만드는 곳이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직접 학교를 운영하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남녀 공학제를 실시했다. 독립운동 시기, 이승만은 직업란에 ‘교육자’라고 적힌 여권을 가지고 다녔다. 해방 이전부터 그는 이미 ‘준비된 교육 대통령’이었다.

일제시대에 어떤 형태로든 ‘교육’을 받아 본 사람은 14%에 불과했다. 문맹률은 80%가 넘었다. 중학교 이상 졸업자가 전 국민 중 2만 5000명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중학교만 졸업해도 상위 1% 안에 들었다. 헌법 문제를 다룰 법학박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달성하려면 반드시 종교와 교육을 선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와 교육과 민주주의를 연결된 개념으로 보았다. 이는 한성 감옥에서 정립한 ‘기독교 입국론’의 연장을 뜻한다. 마침내 기독교 교육으로 국민이 각성해야 독립 민주 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취했다.

이승만은 우리 교육 역사를 바꾸어 놓을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승만이 펼친 교육 정책은 헌법 제정에서 출발했다. 건국 헌법 16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지닌다. 적어도 초등 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이전까지는 부모가 선택해야 자녀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부모가 허락하면 학교에 갈 수 있었고 안 보내주면 못 갔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건국할 때부터 ‘교육은 부모가 좌우할 수 없다. 교육은 이 나라에 태어난 모든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라고 규정했다.

국민에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면 국가는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제헌 헌법은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무 교육제를 채택했다. 그런데 초등 의무교육 조항 앞에 ‘적어도’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최소한 초등학교’라는 뜻으로, 앞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로 의무 교육을 확대해 나간다는 의지를 담았다.

헌법 16조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조항 중 하나였다. 논의하는 과정에서 수정 제안이 6개나 제출되었다. 교육가 주기용은 이렇게 말했다.

“교육이 국책상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요, 모든 건국의 기초를 교육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건국하는 과정에서 교육을 등한히 한다면 국가 백년대계가 끊어질 우려가 있다. 다른 헌법 제정에 수정안은 없으나 이 교육 조항에 대해 6조항이나 수정안이 난 사실은 교육에 대한 모든 관심이 이 16조에 쏠려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승만이 통치하던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빈곤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굶주리는 나라가 정부 예산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했다.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고 학생들을 배출했다.

이승만 집권 후반기에는 학교에 갈 나이인 아동 96%가 취학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제시기에 어떤 형태로든 교육받은 사람이 14%에 불과하던 사실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다.

모든 연령대에서 학생들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가장 큰 증가세를 보인 연령은 대학생이었다. 이승만이 물러날 당시, 국내 대학생 비율은 영국보다 많을 정도였다. 특히 여대생 수치는 이승만 집권 초기보다 무려 17배나 증가했다. 대한민국 교육이 남녀평등을 밑바탕으로 한 사실을 보여 준다.

이승만이 추진한 교육 혁명은 국내에 제한하지 않았다. 해방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던 학생은 모두 합쳐서 500명 미만이었다. 이승만 집권기에 유학, 훈련, 연수 같은 다양한 형태로 미국에 보낸 인원은 2만여 명이었다. 훗날 대통령 박정희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가 이승만 집권기에 미국 땅에서 공부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6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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