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1-19 10:20:53 ]
전쟁 중에도 나라 인재는 끝까지 보호하며 길러
국민을 교육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열의는 6·25전쟁 중에도 식지 않았다. 북한군에 밀려 임시 수도로 정한 부산에서 전시 학교를 운영했다. 이승만의 미국인 정치 고문 로버트 T. 올리버는 전쟁 당시에 방문한 야외 중학교를 본 소감을 이야기한다.
“무지개 꼴인 학교 문에는 글귀가 적힌 광목이 달려 있었다. ‘이곳은 우리의 싸움터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나라를 자유롭게 하는 길을 배운다.’ 피난통에 밥은 못 먹어도 아이들 손에 책이 쥐어져 있었다.”
전시 학교에는 전쟁에서 가장 왕성한 전투력을 보유한 젊은이들이 모였다. 이십 대 초반, 학령기로 따지면 대학생들이 군인으로서 가장 적합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이승만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조처를 내렸다. 이 대통령은 대학생들을 병역에서 면제했다. 전쟁 중인데, 그것도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병사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인데, 대학에만 들어가면 군대 안 가도 된다는 국가 조처는 엄청난 특혜였다. 이런 특별 조처로 이승만은 인재를 보호했다.
이승만이 조처를 내리지 않았다면, 전쟁 통에 한 세대가 통째로 없어졌을 것이다. 이승만은 위급한 상황에 몰렸으나 결국에는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보존되리라 믿었다. 종전 후 나라를 다시 복구하고 성장할 모습도 미리 내다보았다. 나라를 일으킬 때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려고 비상한 대책을 세웠다.
이승만이 생각한 교육 대상은 비단 아동에 국한하지 않는다. 자라나는 세대는 학교에서 교육할 수 있으나 이미 자라난 성인들이 문제였다. 배울 기회를 잃은 이들은 까막눈으로 살아야 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학교는 물론 전국적으로 모든 마을과 공동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문맹 퇴치와 성인 교육을 시행할 크고 작은 집회를 끊임없이 개최하였다. 문맹 퇴치는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데 꼭 필요했다.
이승만 정부는 ‘작대기 투표를 일소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출마한 후보 이름조차 쓸 수 없고 읽을 수 없어서 작대기 표시로 사람을 구분하는 국민 수준이라면, 민주주의가 어렵다는 판단을 구호에 담았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80%를 훌쩍 넘던 문맹률은 그가 물러날 때 20% 이하로 떨어졌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거의 전 국민이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다.
당시에 ‘우골탑’이란 말이 유행했다. 가난한 농가에서 소를 팔아 마련한 등록금으로 세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대학을 빙자한 말이다. 본래 대학은 상아탑이라고 불렸다. ‘상아(象牙)’ 가 ‘우골(牛骨)’로 바뀐 사실은 우리 국민이 지닌 맹렬한 교육열을 반영한다. 시골에 사는 부모들도 소를 팔고 논을 팔아 자식들의 등록금을 대주었다. 그렇게 기른 인재들이 ‘한강의 기적’을 달성했다.
교육 혁명은 토지 개혁과 함께 양반 제도 붕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시대에는 글 읽는 양반과 일하는 상민으로 나뉘었지만, 이제 모든 국민이 글을 읽으니, 양반과 상민을 구분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없어졌다. 성공하는 수단 역시 타고난 신분에서 교육으로 바뀌자 양반제도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
교육 기적은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세계 경제학자들은 종종 한국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한국에서만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는가?” 해방 당시에 한국 경제 수준은 아프리카 가나와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만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세기 후반 50년을 통틀어서 전 세계 경제 성장률 1위를 대한민국이 차지했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을 지나 선진국에 다다른 유일한 나라다. 연구자들은 공통으로 교육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교육으로 인재를 길렀기에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다.
한강의 기적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동 작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박정희가 눈에 보이는 공장, 수출품, 고속도로를 만들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이승만이 길러냈기 때문이다. 공장을 지을 사람, 수출품을 만들어낼 사람, 고속도로를 건설한 사람들은 적어도 글자를 읽을 줄 알고 학교에서 단체 생활도 경험해 보고 규율에 복종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만약 박정희가 공장을 지었을 때, 일하러 온 사람들이 글자를 읽을 수 없어서 작업 규칙을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야 했다면, 과연 이 나라 경제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학교 교육으로 말미암은 단체 생활 개념이 없어 규율에 따르지 않았다면 새마을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한국 경제에서 박정희가 끼친 공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중국 덩샤오핑, 러시아 푸틴이 박정희의 길을 그대로 따라갈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가 달성한 업적은 이승만이 토대를 마련했기에 구축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인재들을 지휘하여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그 인재들은 이승만의 교육 기적으로 길러졌다. 박정희라는 기관차는 이승만이 만든 레일 위를 달린 것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