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2)] 민주주의에 매료돼 점차 마음을 열다

등록날짜 [ 2013-01-29 15:13:32 ]

배재학당에서 6개월 만에 영어 마스터… 교사로 활동
협성회 일원이 되어 토론을 통해 개화사상 받아들여


<사진설명> 당시 배재학당 건물.

조선 최초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1895년 무렵엔 한국인, 서양인, 일본인, 중국인이 두루 섞여 배우고 가르치는 국제학교로 변모해 있었다. 그야말로 조선인에게 ‘서양 문명에 눈을 뜨게 한 별천지’였다. 하지만 그때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천주교도가 학살당하던 시기에서 불과 30여 년도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대다수 조선인은 생소한 서양 문명과 종교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이 많았다.

이승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서양학교를 ‘이상한 약을 먹여 하늘이 노할 사악한 사상을 가르치는 곳’으로 의심했다. 이승만은 특히 기독교 예배를 경계했다. 아침 예배에 나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거기서 뭔가를 먹이거나 마시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상한 약은 먹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예배에서 아펜젤러가 한 설교 말씀을 들었다. 난생처음 참석한 예배에서 최초로 기독교 설교를 들은 소감을 이승만은 훗날 회고했다.

“나는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들었다면 서양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나 혹은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의 관심을 끄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1900년 전에 죽은 한 인간이 내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과학과 의술로 온갖 놀라운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졌는데, 어떻게 그런 우스꽝스러운 말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들 자신은 믿지 않으면서 무지한 사람들만 그런 것을 믿게 하려고 여기에 와 있을 거야. 그러니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만 교회에 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 위대한 부처님의 진리와 공자님의 지혜로 무장한 학식 있는 선비라면 저런 말은 절대 믿지 않을 거야’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승만은 기독교를 터무니없는 종교로 생각했지만, 그에게 영어는 필요했다. 이승만은 발전한 미국 문물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에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어려서부터 발휘하던 천재성은 영어 습득에서도 빛을 발했다. 불과 6개월 만에 배재학당 영어 교사로 임명된 것이다. 영어 학원이나 테이프는 물론, 사전조차 없던 시대에 6개월 만에 영어에 통달하고 교사까지 된 것은 신기에 가까운 성취였다. 이때부터 영어는 이승만의 일생에 소중한 도구이자 무기가 된다.

민주주의에 눈뜨다
1896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 배재학당에 부임했다. 개화파 선구자인 서재필이 12년 만에 귀국한 것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쿠데타인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서재필은 역적으로 몰렸다. 서재필의 가족은 처가와 외가까지 모두 처형됐다. 일본으로 도피한 서재필은 천신만고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시민이자 의사가 되어 미국인 부인과 함께 귀국한 것이다.

서 박사는 한동안 장안의 명물이었다. 그가 ‘실크 해트’를 쓰고 ‘모닝코트’를 걸치고 그의 색다른 부인과 같이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는 늘 구경꾼 몇 십 명이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닐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서재필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미국, 성경, 서양 역사 등 새로운 지식이 그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이승만을 배재학당으로 이끈 신흥우의 말을 따르자면, 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재필에게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갑신정변의 혁명가답게,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혁명적인 시도를 한다. 조선 학생들에게 미국 고등학교에서 배운 토론을 훈련한 것이다. 서재필이 주도한 토론 모임이 협성회다. 협성회 진행 방식은 먼저 토론 주제를 정한다. 그리고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한 팀은 찬성, 한 팀은 반대하는 연설을 하게 한다. 당시에는 토론 문화는 물론, 토론에 관련한 용어 자체가 없었다. 쟁점 사항을 전체 투표에 부친다든지, 의장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다든지 하는 개념도 없었다. 그런 시절에 시작한 협성회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조직한, 의회에 가까운 모임이었다.

협성회와 독립협회
1896년 11월 협성회가 조직될 때, 이승만은 창설 회원 13인 중 한 명이었다. 훗날 이승만은 서기를 맡고 회장도 하는 등, 협성회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다. 토론 주제는 처음에는 비(非)정치적인 것으로 시작했다. 토론이 열기를 더해가고 참가자들의 실력도 늘어 가자, 주제는 점차 정치색을 띠게 되었다. 24회에는 ‘한국에는 상하 양원을 둔 의회제를 성립해야 한다’, 27회에는 ‘각종 정부 기관에서 고용한 외국인 고문관들은 해고되어야 한다’는 주제가 선정되었다.

토론회 주제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이다. 이때는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갖는 개화의 위력은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훗날 이승만이 감옥에서 발전시킨 ‘기독교 입국론’ 뿌리는 협성회 시절부터 심겼다.

토론을 거듭하면서 참석자들의 자신감도 커졌다. 당대에 가장 앞서 가는 학문을 배우고 웅변술, 토론법, 설득 기술까지 배웠으니 사기가 충천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흔들리던 조선의 운명은 젊은 피를 뜨겁게 했다. 그들은 사명감에 불타서 토론회를 거리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협성회의 정치색이 분명해질수록, 난처해지는 쪽은 학교 측이었다. 배재학당을 이끌던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때문에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학생들의 모임에 일반인도 점차 가세하고 있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부 역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펜젤러 학장은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여러 번 당부했다. 그러나 협성회는 자제하기보다 확장하는 쪽을 선택했다. 학교의 우려를 고려하여 아예 배재학당을 벗어난 대중적인 조직으로 변신한 것이다. 1896년 6월 7일 협성회라는 이름을 독립협회로 바꿨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2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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