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4)] 한 해 세 신문을 창간한 진기록

등록날짜 [ 2013-02-13 10:25:58 ]

이승만의 <협성회회보> 활동은 배재학당과 아펜젤러 학장에게 부담을 주었다. 날카로운 논설이 정부를 자극하니 선교사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아펜젤러는 신문 내용을 부드럽게 하라고 요구했지만, 열혈 청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협성회회보>는 협성회와 비슷한 순서를 밟았다. 협성회가 배재학당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협회로 성장한 것처럼, <협성회회보>는 <매일신문>으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최초’가 등장한다. 1898년 4월 9일에 창간된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 일간지였다. 주간지가 일간지로 성장한 것은 그만큼 반응이 좋았다는 점을 반영하며 신문 제작진들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매일신문>의 사장 겸 주필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한국 최초 일간 신문 편집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우리나라에 일간지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는 사소해진 것이, 역사에서는 중요하게 취급되는 예가 많다. 요즘에야 날마다 신문이 배달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는 역사에 기록할 만한 새로운 사건이었다.

<매일신문>은 1898년 5월 16일 자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권을 요구한 외교 문서를 폭로했다.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 사방으로 10리를 차지하려 했고, 프랑스는 평양 석탄광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에 사용하려고 했음을 보도했다.

이 기사는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즉각 독립협회가 들고 일어나 정부 측에 사실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독립협회는 질의서에서 “본국의 땅은 선왕의 강토요, 인민이 생업하는 땅인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아야겠다”고 항의했다.

<매일신문> 보도와 독립협회 항의로 여론이 들끓자, 러시아와 프랑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 측에 외교 문서가 유출된 경위를 따지면서 관련자 처벌을 주장했다. 그들 열강에서 볼 때 <매일신문>은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다. 당시 외국 공관은 정부 대신들보다 신문을 더 꺼리게 되어 ‘군사 몇 만 명보다도 더 어렵게’ 여길 정도였다.
 


<사진설명> 이승만이 창간한 신문들.

<매일신문>은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경영상 문제로 곧 발행을 중단했다. 이승만은 곧이어 1898년 한 해 동안 <협성회 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모두 창간하는 희한한 업적을 남겼다. 한 해 동안 무려 신문 3개를 창간한 기록은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제국신문>은 조선을 합병한 일제가 모든 한국 신문을 폐지한 1910년 8월까지 12년 근속했다. 그 시기 대표적인 신문으로 <황성신문>과 <매일신문>을 들 수 있다. <황성신문>은 주로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한자와 한글을 겸용했다. <제국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상민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글 전용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도 이승만이 걸은 대중적인 노선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두 신문의 편집인이 모두 배재학당과 독립협회에서 서재필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는 점이다. 서재필이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불의한 시절, 정의파 언론인 이승만은 붓의 힘으로 싸웠다. 1898년 8월 30일 자 <제국신문>에는 이승만 기자의 특종 기사가 실렸다. ‘대한 사람 봉변한 사실’이다.

“일인(日人)이 수교에서 배를 사서 껍질을 벗길 새 옆에 앉은 대한 사람 하나가 침을 잘못 뱉다 일인의 옷에 떨어진지라. 일인이... 장동 사는 강홍길을 집탈하여 가지고 배 벗기던 칼로 강가를 찔러 다행히 중초(中焦, 심장에서 배꼽 사이)는 상하지 아니하였으나 바른 편 손을 찔러 유혈이 낭자한지라….”

침을 뱉었다고 칼로 찔렀으니, 우리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들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인이 칼에 맞았는데도 한국 순검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대조적으로 일본인 순사가 와서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 사람을 자신들의 경찰서로 연행했다.

현장에 있던 군중은 격분하여 일대 소동이 벌어졌고, “칼질한 놈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처벌하라”고 요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자 이승만은 <제국신문> 4페이지 가운데 2페이지 반을 할애하여 이 사건을 소상히 보도했다.
 
“그날 밤에 수백 명이 대한경무청에 가서 억울하고 원통함을 하소연하려 한즉, 그곳 있는 순검들이 다 살아서 위임도 내고 소리도 크게 질러 감히 가까이 오지 말라 하거늘, 백성이 소리 지르기를 이날 백성이 이 나라 경무청에 와서 호소하려 하는 것을 어디로 가란 말이오....”

우리 백성이 우리 땅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었다. 나라는 그렇게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2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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