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2-05 10:11:41 ]
미국, 영국 등 공사관과 정부 장관 참석한 가운데
졸업자 대표로 ‘한국 독립’에 관해 영어로 연설
1879년 7월, 배재학당 학기말 종강행사를 겸한 졸업식이 열렸다. 그것은 장안에 화제가 된 이벤트였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열리는 서양식 학교 졸업식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그날 행사에는 부득이하게 불참한 한 명을 제외한 당시 정부 모든 판서(장관)가 참가했다. 한양 판윤(시장), 미국 공사와 영국 총영사를 포함한 외국 공사관의 장들을 위시해서 귀빈 6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졸업식 연사는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조선 교육부 대신, 외부무 대신, 서재필, 미국 공사 등이 연단에 올랐다. 이 행사에서 만 스물두 살인 이승만이 한국 학생들을 대표해서 영어 연설을 했다.
이승만이 택한 주제는 ‘한국의 독립’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조선인에게서는 들을 수 없었던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했다. 청중이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때부터 이승만은 젊은 애국자, 조선에서 제일 영어를 잘하는 청년으로 유명해졌다.
유창한 영어로 졸업생 대표 연설
배재학당 학장이던 아펜젤러 선교사가 편집한 영문 잡지
<사진설명> 배재학당 명예졸업장. 이승만은 1897년에 졸업했으나 이 졸업장은 1912년 11월에 발행된 명예졸업장이다.
“이승만의 연설은 전체 졸업식 프로그램 중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었다. 영어로 된 독창적인 웅변이었다. 이제 막 피어나는 이 졸업생 대표는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처음 있는 대학 졸업식사 주제로서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이 나라의 독립만이 젊은이들이 그간 받은 훈련에 알맞은 일터를 제공할 것이다. 국가의 독립은 실질적이고 굳건하며, 영속적이어야 한다’는 연설이 행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씨의 어법은 상당히 좋았고, 그의 감정은 거침없이 표현되었으며 그의 발음은 똑똑하고 명확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 영문판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과거 관계를, 그리고 청일 전쟁을 통한 한국 독립의 성취 과정을 뒤돌아보고, 한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과 위태로운 사항에 관해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의 거침없는 말들은 관객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협성회회보와 고목가
이승만의 평생에는 ‘최초’라는 칭호가 따라다녔다. 그만큼 앞서 간 선구자였다는 증거다. 오늘날에는 정치인으로서만 알려졌지만, 사회인 이승만의 첫 발자취는 언론계에 남아 있다.
1987년 1월, 주간지 <협성회회보>가 탄생했다. 그것은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신문이었다. 이승만은 주필로 활약하며 필봉(筆鋒)을 휘둘렸다. 이승만의 개혁적인 정치의식은 탁월한 문장력으로 발휘되었다. 한편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이승만의 비판적인 논조를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승만 자신의 목소리를 인용한다.
“나는 그 지면을 통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나의 힘을 다해서 역설했다…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 씨와 다른 사람들은 내가 급진적인 행동을 계속하다가는 목이 잘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 번 충고해 주었지만, 그 신문은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공사관의 위협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고난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간되었다.”
1898년 3월 9일 자 <협성회회보>는 우리 문학사(文學史)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승만의 시 고목가(枯木歌)가 실린 것이다.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이승만이 평생 남긴 시는 한시(漢詩)가 대부분이다. 고목가(枯木歌)는 그가 남긴 유일한 한글 시다.
이 시로 말미암아 이승만은 또 한 번 ‘최초’의 지위를 획득한다. 조선 말엽 개화기에, 전통적인 시가의 형태와 다른 새로운 시들이 탄생했는데, 이를 신체시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는 최남선(崔南善)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남선의 작품이 <해조신문>에 실린 때가 1908년이고, 이승만의 ‘고목가’는 1898년에 <협성회회보>에 수록되었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근대시, 신체시의 명예는 이승만의 ‘고목가’로 돌려야 한다.
고목가의 율조와 형식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4년에 펴낸 <찬양가> 초판에 나오는 노래를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고목가는 동양 소재와 서양 형식을 절충하여 지은 시라 할 수 있겠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2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