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5)] 민주주의 향한 위대한 투쟁

등록날짜 [ 2013-02-19 16:50:29 ]

 
<사진설명>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는 모습. 서 있는 이는 이승만의 열렬한 후원자 이상재 선생이다.

독립협회가 남긴 빛나는 발자취 중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다. 만민공동회는 시민, 독립협회원, 관료 등이 참여하는 대중집회로 당시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외세, 특히 러시아를 비판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는 여론을 만들어냈다.

만민공동회의 중요성은 명단에서도 확인된다. 만민공동회에서 활약하던 독립협회 간부 명단에는 훗날 상해 임시정부는 물론, 다양한 민족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사들의 이름이 거의 포함되어 있다. 독립협회가 이 나라 독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이다.

1898년 3월 15일, 만민공동회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에 이양한 이권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우리 내정에 간섭하는 러시아 고문을 파면하고, 우리 경제를 침탈하는 한로은행을 해체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로써는 엄청난 군중인 1만여 명 앞에 등장한 연설가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탁월한 언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군중의 대표자 자격으로 외무장관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강력한 민심을 목격한 러시아는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러시아 고문을 소환하고, 한로은행을 폐쇄했다. 청년 이승만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수구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고종 황제와 친러파 정권은 1989년 11월 4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했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했다는 역적 혐의였다. 독립협회 3대 회장 윤치호와 회원들은 도피해 잠복했다.

하지만 행동파 이승만은 숨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경무청 앞으로 달려갔다. 수천 명이 그를 따라갔다. 이날 이승만은 최초로 서양식 연좌 농성을 하며 또 한 번 ‘최초’를 기록했다. 이승만을 이 나라 최초의 운동권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승만은 날마다, 쉴 새 없이 연설을 계속했다.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시위대를 향하여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흩어지지 말라고 외쳤다. 여기에서 이승만을 대표하는 구호가 탄생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뒤, 기나긴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칠순의 이승만이 해방된 조국을 향하여 제일성으로 외친 바로 그 말이었다.

집권층은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추위와 배고픔과 졸음에 시달린 시위대 앞에 군악대를 앞세운 군부대가 나타났다. 연설하던 이승만은 그대로 돌진했다. 군인을 발로 차며 “돌아가라”고 외쳤다. 다음 날 신문에는 이승만 앞에 ‘싸움패’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때 수구파 정부는 무력 사용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외국 사절들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5일간에 걸친 투쟁의 승리자는 이승만과 시위대였다. 고종은 구금된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석방했다.

사기가 오른 이승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고종 황제는 말 바꾸기의 명수였다. 개화파에게 여러 번 개혁을 약속했지만, 말뿐이었다. 이승만은 고종이 독립협회에 약속한 개혁 방안인 헌의 6조를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고종 황제와 수구파는 본때를 보여 주기로 작정했다. 수구파가 동원한 물리력은, 유서 깊은 보부상(褓負商)이었다. 보부상은 보따리에 물건을 싸서 다니는 보상(褓商, 봇짐장수)과 등에 지고 다니는 부상(負商, 등짐장수)을 합한 말이다. 당시처럼 도로와 운송수단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에는 보부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대한제국 시기에 보부상은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물건을 들고 혹은 지고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던 만큼, 보부상들은 강건한 사나이들이었다. 국가의 물리력으로 동원될 만큼 전투력도 뛰어났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의 시위 현장에 보부상을 투입했다.

1898년 11월 21일 이승만이 궁궐 앞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보부상들이 습격했다. 치고받는 유혈극이 벌어졌는데, 선두에는 보부상의 두목 길영수가 있었다. 난투극은 결국 죽음을 불러 독립협회 김덕구가 보부상에게 맞아서 사망했다. 김덕구의 장례식에 또다시 수천 명이 운집했다. 군중 규모에 놀라고 물리적 진압에 한계를 느낀 고종 황제는 사태를 무마하고자 했다.

황제는 독립협회장 윤치호와 황국협회 수령 길영수를 불러 놓고 정부를 개혁하고 독립협회원을 함부로 체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고종은 여러 번 약속을 어겨서 신뢰를 잃었기에, 약속을 지킨다는 보증으로 외국 사절들이 자리를 지켰다. 고종이 직접 증인으로 외국인을 불렀다고 말했다. 황제 스스로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며 외국인을 증인으로 세울 정도였으니, 나라의 체면과 황제의 체통이 말이 아닌 지경이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2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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