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4-09 09:03:31 ]
조선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 서양 국가 중 처음으로 미국과 국교를 맺을 때(1882년), 조약 1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만약 제3국이 양국 중 어느 한 나라에 어떤 불공평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면 그들은 상호 간에 통보하고 반드시 서로 도와야 할 것이고, 알선을 통해 평화적인 타협에 도달할 수 있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상호 우호 관계를 보이도록 한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을 때, 조선 집권자들은 이 조약을 떠올리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이승만과 명성왕후의 조카로 당시 걸출한 지도자 중 하나인 민영환이 출옥하도록 도운 한규설은 미국에 조약 이행을 요청하는 특사를 비밀리에 보내고자 했다. 그때 특사로 거론된 인물이 이제 막 출옥한 이승만이었다.
사람 운명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역적 이승만이 갑자기 국운이 걸린 중대사를 떠맡게 된 것은 탁월한 영어 실력을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22세에 외교관과 고관대작 앞에서 영어 연설 실력을 발휘한 바 있지만, ‘한성 감옥 대학’에서 이승만의 영어 실력은 더욱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1904년 11월 5일, 이승만은 조선에 호의적이라고 알려진 딘스모어(Hugh A. Dinsmore) 의원에게 보내는 정부의 밀서를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 한성 감옥 형무소 부서장인 이중진이 이승만에게 여행 경비를 제공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끼친 감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사관에 도착하자 서기관 김윤정을 찾아 자신의 비밀 업무를 털어놓고, 김윤정에게 일이 성사되도록 돕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다만 김윤정은 대리공사 신태무가 일을 방해할지 모르니 신태무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요청했다(당시 서기관 김윤정과 대리공사 신태무는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또 자신이 대사관 공사로 승진하면 이승만이 특사 활동을 하는 데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이승만이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의 발효를 미국 국무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할 의사가 있는지를 질문하자,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이승만은 민영환에게 김윤정을 추천하여 김윤정이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이승만은 특사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민영환과 한규설이 작성한 친서를 딘스모어 하원의원에게 전달했고, 헤이(John Hay) 국무장관과 면담도 주선 받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헤이 장관은 한국 선교에 관심을 표명하며 돕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승만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헤이 장관이 이듬해 갑자기 사망하여 바라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이 무렵 이승만에게는 민영환과 한규설이 보낸 밀서 이외에 전달해야 할 또 하나의 문서가 있었다. 바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할 청원서를 전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1905년 7월 5일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가 단장으로 있는 미국의 아시아 순방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했다. 단장인 태프트는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이어 2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만큼 정계 실력자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참여한 순방단은 100여 일 동안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을 돌아보았다.
순방단이 하와이를 거칠 때, 그곳에 거주하던 한국 교민은 순방단을 맞아 성대한 환영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일본이 위협을 가해 대한제국이 위태로워졌다는 상황을 설명하며 미국이 대한제국을 돕도록 간청했다. 태프트는 대단히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작성해 주었다. 이에 크게 고무한 교민들은 ‘하와이 거주 한국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을 대표한 윤병구 목사와 함께 태프트의 소개장을 앞세워 1905년 8월 4일 뉴욕 시 동쪽 오이스터만에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 별장을 방문했다. 그들을 만난 루스벨트는 대단히 호의적이었고, “귀국(貴國)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은 정식 절차를 밟아야 하니, 청원서를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사관을 통해서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면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 회담에 즉각 제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은 날아갈 듯이 기뻐했다. 희망에 부풀어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정식 외교 경로를 거쳐야 할 경우, 적극 도와주겠다고 한 김윤정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나 김윤정은 이승만이 알던 그 김윤정이 아니었다.
사실 김윤정은 이중 거래를 하고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자신이 공사가 되면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워싱턴에 있는 일본 공사에게 이승만이 활동하는 내용을 상세히 보고하며, 자신이 한국 공사가 되면 일본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훗날 김윤정은 일본 측에 협력한 결과로 전라북도 도지사가 되기도 했다.
김윤정은 이승만의 요청을 거절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이승만은 멍해졌다. 정신을 가다듬은 이승만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고 애원하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경찰을 부르겠다는 김윤정의 위협을 받으며 공사관에서 쫓겨났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