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12)] 소는 비빌 언덕이라도 있는데…

등록날짜 [ 2013-04-16 14:14:54 ]

당시 미국도 조선을 도울 아무런 명목이 없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조선에 불리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팽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러시아는 국제적인 압력을 가하여 일본이 부당하게 빼앗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주도록 했다. 그러고는 3년 후에 자신들이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만천하에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 역시 같은 편이었다. 이는 러일 전쟁 당시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적극 지원했다는 사실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더군다나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발전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후발 주자가 메이지 유신 이후로 눈부시게 성장한 모습에 찬사를 보냈지만 조선의 후진성에는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러시아를 억제하려면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해야 한다. 일본이 조선을 손에 쥔 모습을 보고 싶다. 조선은 자신을 지키려고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말만 하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 침탈을 돕는 행동에 적극 나섰다. 이 사실은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24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존스홉킨스대학교의 데넷 교수가 루스벨트의 서한집에서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폭로한 것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는 일본이 한국을,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해도 좋다고 합의하였다. 7월 31일 루스벨트는 전보를 보내어 “태프트가 한 말에 모두 동의한다”고 밝혔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태프트와 루스벨트가 사실에 확인 사살까지 한 셈이다.

이처럼 미국은 이미 일본을 밀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노력이나 김윤정의 배신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승만도 훗날 이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1882년에 체결한 한.미수교 조약은 한갓 외교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어리석고 순진하게도 그 조약에 기대를 걸었다.”

결국 대한제국 특사로서 이승만이 한 활동은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훗날 ‘외교의 신’으로 격찬받은 이승만이 탄생하려는 진통의 시작이었다.

<사진 설명> 이승만이 워싱턴 D. C. 소재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할 무렵(1907.7). 당시 학비는 장학금으로 면제받고, 생활비는 한국·동양에 관한 강연으로 조달했다.

이승만은 이 사건을 시작으로 반세기에 걸쳐 외교 관계에서 힘이 없는 나라가 얼마나 서러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강대국들이 물건을 흥정하듯 약소국을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국제적 이해관계에 직면하며 강대국의 논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과 시련이 쌓이고 모여서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외교가가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훗날 미국이 1882년의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을 미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적절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2009년에 제임스 브래들리가 쓴 『임페리얼 크루즈(Imperial Cruise)』의 한국어 번역판에는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대한제국 침탈 외교 100일 기록’.

제목이 뜻하는 대로, 제국주의를 싣고 갔던 유람선은 1905년에 태프트가 탔던 바로 그 유람선이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고생하던 우리 선조들이 피땀 흘려서 모은 한 푼 두 푼을 내놓아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주었던 그 유람선이며, 조국의 멸망을 막으려는 애타는 염원을 전달했던 유람선이다.

제국주의 순방단의 비밀 임무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미국의 필리핀 강점, 일본의 조선 강점을 서로 인정하는 밀약을 타결 짓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맏딸 앨리스를 동승하게 해서 비밀 업무를 은폐하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바람잡이 역할을 맡겼다. 한국어판에 붙은 제목처럼, 그것은 대한제국 침탈 외교였다.

7월 14일에 하와이에서 우리 교민의 눈물 어린 간청을 듣고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써 주며 동정심을 보였던 태프트는 다음 날 호놀룰루를 떠나서 7월 25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 27일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태프트가 조선인에게 보여준 태도는 철저한 위선이었고 기만이었다. 겉으로는 조선을 돕는 듯했으나 결국에는 일본에게 한국을 넘긴다는 속셈이었다. 당시 미국은 대한제국을 도울 아무런 명목도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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