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6-12 10:09:35 ]
드디어 우리 민족과 정부의 대표자로 등장해
<사진 설명>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둘째 줄 중앙에 앉은 이가 임시 대통령 이승만 박사.
1919년 3월 1일, 삼일 운동이 일어났다. 나라 잃은 10년 동안 억눌리고 핍박받은 우리 민족이 독립을 향한 열망을 뿜어냈다. 3.1 운동은 평화적인 시위였다. 민족 대표 33인이 마지막 지시 사항으로 비폭력을 당부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인을 모욕하지 마라. 돌을 던지지 마라. 주먹으로 때리지도 마라. 그런 행동은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3.1 운동은 간디가 유사한 운동을 일으키기 3년 전에 일어났다.
3.1 운동이 일어난 뉴스는 전 세계에 퍼졌다. 약소국이 표출한 용기 있는 저항에 전 세계가 찬사를 보냈다. 1919년 4월 6일 『LA 타임즈』는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제목으로 3.1 운동 기사를 실었다.
“이들의 선언은 우리의 독립 선언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다. 신의 가호로 미친 세상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그러나 미친 세상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고 약소민족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평화적인 시위를 일제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되갚았다. 조선총독부 연례 보고서에 보면, 당시 조선 전체 인구 1728만 8989명 중에서 무려 83만 1667명이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3.1 운동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미국 국무부에 전보를 보냈다. 한국 애국자들이 일본에 탄압받지 않게 미국이 중재해 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3.1 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인 동시에, 이승만의 일생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에는 임시 정부가 여러 곳에 세워졌다.
그중에서 정부 요인 명단을 발표한 곳은 여섯 군데이었는데 이승만은 여섯 군데 모두 최고위급 각료로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이승만은 이미 45세 전후에 우리 민족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자리했다.
이승만은 실제적인 활동을 펼친 임시 정부 세 곳에서 모두 최고 지도자로 있었다. 이승만은 러시아 노령 대한국민의회 국무총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 한성 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임시 정부마다 체계가 다르고 규칙이 달라서 국무총리, 집정관 총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병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 모든 망명 정부가 대통령으로서 받든 사람은 오직 이승만뿐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맡았던 직위 중에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에서 13개 도 대표 25명이 국민대회를 거쳐 최고 지도자로 추대한 것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한성 정부가 이승만을 추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승만이 지닌 개인적 능력의 탁월함, 한성 정부 중요 인사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 미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적임자라는 요인을 높이 샀다.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형성한 인맥이 한성 정부 핵심 인물들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복당 동지’였던 신흥우와 이상재 역시 이승만을 적극 지지했다. 특히 성자와 같은 삶으로 한국인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던 기독교 교육자 이상재가 이승만 추대에 앞장섰다.
한성, 노령, 상하이의 임시 정부는 결국 하나로 합쳐져서 통합 상하이 임시 정부가 되었다. 1919년 9월 상하이 임시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세워져 임시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우리 민족과 정부의 대표자로 등장했다. 임시 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수행한 첫 업무에 관해서 로버트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열강의 정부 수반들에게 외교 관계 개설을 제안하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한 셈이었다. 자금과 강력한 지지자도 없는 소규모 망명 단체가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따름이다.”
임시 정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독립운동 방법으로 외교 노선을 택했다. 이는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 이미 암시되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이 주변국에 자주권을 침해받은 원인은 자주적인 외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생존하려면 외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일찌감치 간파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4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