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 국권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킨 목회자

등록날짜 [ 2013-10-01 10:14:09 ]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신앙에도 영국의 간섭을 받았으나
끝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다가 결국 순교로 삶 마쳐

약 400년 전, 자유로운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천국 소망을 전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다 순교한 목회자가 있다. 바로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다. 러더포드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1600년경에 태어났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국왕으로 재위할 때,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를 탄압하는 절대주의가 절정기에 이른 시기였다. 로마가톨릭, 영국 국교 아래 있는 사람들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했지만, 껍데기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성경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청교도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스코틀랜드 출신인 제임스 1세가 왕이 되었다. 청교도는 제임스 1세에게 희망을 걸었다. 스코틀랜드에는 로마가톨릭이나 영국 국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개신교가 이미 정착했다. 그래서 영국 국민은 청교도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왕권은 신이 준 것으로, 인민은 왕에게 절대복종하여야 한다는 정치 이론)을 내세웠다. 군주에게 복종하라고 강요하고 국교를 따르지 않으면 몰아내겠다고 의회와 청교도들을 협박했다. 이에 청교도는 새로운 교회를 신대륙에 세우려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났다. 이때가 1620년이다.

신앙 지키려 영국 국교회에 저항
러더포드는 161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하여 1626년부터 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 러더포드는 조심성 없는 철부지였으리라 여겨진다. 친구인 윌리엄 고든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회고할 때, 죄의 잿더미를 뒤집어썼으니 이제는 애통과 후회의 불씨가 되었네”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친구에게도 쓰기를 “정말 어리석은 바보처럼, 한창때를 허송세월하며 천국을 향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문 앞에까지 당도하기도 전에 내 인생의 오후가 가고 있네” 하며 회한하고 있다.

1627년 설교 자격시험을 통과한 러더포드는 ‘안워스’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초빙돼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교회는 30여 평 정도로 마치 헛간 건물을 연상케 하는 곳이며, 대략 250명이 앉기에도 협소한 장소였다.

사역이 2년쯤 지났을 때에 러더포드는 “내 사역의 열매들이 얼마나 작은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그 날에 즐거워할 단 한 영혼에게 기쁨의 화관이 될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터입니다” 하는 말을 남겼다.

안워스의 신자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헌신적인 목사를 보내 주셨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러더포드 목사님은 늘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며, 수시로 병든 자를 심방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잠잘 때도 자주 그리스도에 관해 잠꼬대했다고 전해진다.

1630년 어느 날, 러더포드는 사랑하는 아내를 여의고 연이어 두 자녀를 잃었다. 갖은 슬픔과 어려움에 더하였고 사역하는 교회 공간이 협소했는데도 큰 장소로 이동하려 생각지 않았다. 1631년에 작성한 글에서 보듯 “그분의 손이 친히 나를 이곳에 심으셨으니 포도밭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옮겨심기에 적절한 시기라 생각되어 작정하실 때까지 나는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머지않아 옮겨심기에 적절한 ‘시기’는 찾아왔지만, 그 ‘방식’은 그의 짐작이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1636년 러더포드는 당시 허술한 신학을 겨냥하여 『하늘의 은총에 관한 논증』을 출판했다.

책 내용이 국교회의 반발을 불러왔고, 1636년 7월 27일 에든버러에서 종교 재판을 받는다. ‘추방’이라는 판결과 함께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는 두 번 다시 설교할 수 없다는 제한적 자격 박탈이 뒤따랐다. 애버딘으로 유배되어 1636년 8월 20일부터 1638년 6월까지 ‘유배된 목사’라는 주변의 수군거림을 감내해야 했다.

설교는 할 수 없었으나, 성도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편지글에서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신부’ ‘주님의 포도밭’ ‘어부의 배’라는 세 가지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으나
1638년 11월 러더포드 목사의 자격이 회복, 복권되어 공식적인 목회 사역을 재개한다. 이듬해 에든버러에 있는 세인트 메리대학 신학부 학장으로 초빙되어 제자를 키우는 사역에 임한다. 1643년 러더포드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모든 교회를 대변하는 대표자 자격으로 런던에 갔다. 1647년 11월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러더포드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위기의 문턱까지 가게 된다.

문제가 된 점은 러더포드가 펴낸 『법과 군주(Lex, Rex)』라는 책이었다. 책에서 나타난 러더포드의 글이 지금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제는 민주주의나 인권에 지극히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 찰스 1세와 2세 치리 시기에 민주주의나 헌법에 입각한 권리를 요구하는 일은 그 즉시로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일을 뜻했다.

영국 의회의 공식적인 소환 영장이 왔으나, 러더포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1661년 3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영광이구나, 아름다운 그곳 임마누엘의 땅에서 살게 된다는 사실이.”

1664년 그의 제자 로버트 맥워드가 출간한 『사무엘 러더포드 서간집』은 오늘날까지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높이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 생기게 만드는 책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35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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