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 오직 예수와 회개만을 외친 설교자

등록날짜 [ 2013-10-15 09:43:47 ]

엄격한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이후 회개 복음 전파
죽음 하루 전날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휫필드는 조상 중에 많은 성공회 성직자가 있으나 아버지는 여관 주인이었다. 숙박업을 하던 아버지는 휫필드가 두 살 때 죽었고, 어머니는 8년 후에 재혼했다. 가정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휫필드는 네 살 때 홍역을 앓았다. 간호사 실수로 눈 부위에 흉이 생겨서 휫필드는 사시처럼 보였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휫필드는 소년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다른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범하며 살았다. 일례로 어머니 지갑에 몰래 손을 댔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가장 강렬하게 휫필드를 사로잡은 생각은 ‘언젠가 꼭 성직자가 되리라’는 굳은 결심이었다. 휫필드는 일기장에 “성직자들이 읽는 기도서를 따라 읽는 버릇이 있다”고 썼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지만 동시에 죄를 떨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심각한 죄의식에 빠져 지냈다.

열여덟 살이 된 휫필드는 옥스퍼드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에 진학했다. 식비와 수업료를 면제받는 대신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입학했다. 당시 근로 장학생은 부유층 자제들이 지내는 방 청소와 심부름 같은 시중을 드는 조건이었으므로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웨슬리 형제와 만나다
옥스퍼드에서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를 만나고, 이들이 이끌던 홀리 클럽에 참여했다. 당시 웨슬리 형제와 홀리 클럽 동료는 윤리적,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인식이 없었다. 휫필드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율법주의자로 종교적 실천과 서로 간의 훈육,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제 사역에 중점을 뒀다.

휫필드는 이 같은 종교적 선행과 경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홀리 클럽과 관계를 끊고 간단한 빵과 차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다.

마침내 휫필드는 1735년 봄, 로마서 8장 15~16절 말씀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확신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휫필드에게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눌린 생활을 하던 휫필드는 로마서 말씀에서 믿음으로 “양자의 영(롬8:15)”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자 천국의 기쁨을 얻었다. 이때 맛본 거듭난 체험은 휫필드의 영적 생활과 사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736년 6월 10일, 휫필드는 목회 사역을 시작했다. 휫필드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체험과 이로써 얻는 천국의 기쁨을 소개하는 주제로 설교했다.

암울한 시대 상황
1700년대 영국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몹시 소란했다. 영국 국교회는 세속화하고, 자연신론(Deism)과 이성주의(Rationalism)가 교회에 침투하여 성경의 권위에 도전했다. 교회는 예수 복음을 전하지 않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에 빠져 생명력을 잃었다.

이런 때에 “회개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 휫필드가 부름받았다. 휫필드가 전하는 성령의 소리를 듣고자 수많은 군중이 몰렸다. 1739년 8월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크라이스트교회(Christ Church)에서 설교할 때 매우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교회당에 수용할 수 없자, 옥외에서 설교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8000명, 네샤미니에는 5000명이 모였고, 팩스 매너와 같은 작은 마을에도 1만 2000명이 모였다.

11월에 휫필드는 런던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런던 교회들이 휫필드가 설교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구령의 열정으로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교회가 아닌 야외에서 설교했다. 당시 목회자들에게 들을 수 없던 하나님 말씀을 휫필드에게 듣고자 인파가 구름떼처럼 모였다. 거대하게 운집한 군중은 휫필드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야외 강대상을 설치해 줬다. 여기에는 빈민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 상류층도 참석했다.

휫필드가 하는 설교는 언제나 죄, 인간의 심성, 예수 그리스도, 성령, 회개의 절대적 필요성, 믿음, 거룩함과 그 외 성경이 제시하는 내용만을 전했다. 한결같이 순수한 복음만을 외쳤다. 들판이나 거리에서 모인 옥외 집회에는 보통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이 모였다. 음향 시설이 없던 그 시절에 사람들은 휫필드 목사가 전하는 설교를 어떻게 들었을까? 휫필드는 풍부한 음성과 음량을 지녔다. 물론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뒤따른 결과다.

열정적으로 복음 전하다가
휫필드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영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웨일스, 스코틀랜드(14회), 아일랜드(3회)를 방문하여 부흥설교를 하였다. 또 미국에서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다.
 

사진설명-거리에서 설교하는 조지 휫필드.

휫필드는 전 생애를 통틀어 미국에 7번 방문했고, 대서양을 13번이나 건넜다. 주당 4시간에서 6시간 정도 설교했고, 목회 생활 34년 동안 총 8000회가 넘게 설교했다. 성령께서 휫필드를 강권적으로 사용하신 데 반해 마귀역사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휫필드를 험담하고 모함했다. 그러나 휫필드는 이 같은 모함 일체를 무시했으며, 오직 예수만을 전하는 데 집중했다.

1770년 9월 30일, 휫필드는 마지막 미국 전도 여행 중에 매사추세츠 주 뉴버리포트에 있는 교회에서 숨을 거두었다. 휫필드는 숨을 거두기 전날까지 설교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5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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