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2-10 09:49:38 ]
동양 최초 기독교 국가라는 비전 이뤄나가
<사진설명> 1958년 3월, 공군 K-16기지교회 5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내외.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12월 기독교세계봉사회(美교회 구호활동단체) 책임자로 일하던 아펜젤러 목사와 <크리스천 센추리> 기자를 만났다. 이 대통령은 아펜젤러에게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부, 국회, 나라 전체에서 영향력을 끼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말은 당시 한국 인구 중 기독교인이 5%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국가 지도부는 물론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승만이 임명한 장관급 고위직 135명 가운데 거의 절반인 47.7%가 기독교인이었다.
이는 교회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교육 수준이 높았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김구는 기독청년회 총무로 황해도에서 기독교 교육에 전념했다. 이승만은 YMCA 총무를 비롯한 다양한 기독교 활동 경력을 밟았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 보호 아래 자라났고 여운형은 직접 교회를 세워 7년 동안 전도사로 일했다. 당시 교회가 인재를 길러내는 요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승만 정권에서 시작한 군종 제도는 우리나라 복음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1951년 2월 7일 전쟁 중에 군종 제도를 공적으로 실시해 39명이 활동했다. 1952년 초까지 군종 80명을 배치했다. 약 1년 동안 육군, 해군, 군병원에서 활동했는데,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개종자는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다.
1954년에 이르러서는 전체 군 장병 가운데 개신교가 20%, 천주교가 4%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50년대 중반 교회사가 김양선은 “군종 사업은 한국 기독교 반세기동안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획기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승만은 기독교를 확산하고자 국가 의식의 기독교화, 국기 주목례 실시, 기독교인 등용, 군대의 군목제도와 형무소의 형목제도 실시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외에도 기독교 신문과 방송국, YMCA를 지원했다. 이승만이 쏟은 노력은 당대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았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교회연합운동 선구자인 남은(南隱) 김인서(金麟瑞·1894~1964) 목사는 1952년 3월 “대통령 자신이 기독교 건국이념을 실천하고 정치면에서도 실시한다”고 평가했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기독교인이 다양한 위치에서 기독교 건국을 향해 노력했다. 신탁통치가 결정된 직후인 1946년 1월 1일에서 3일까지, 한국교회는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려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십자가의 건국이념,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기독교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대통령과 교회, 정치인과 각계각층이 합심하여 기독교 확산에 주력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해방 당시만 해도 기독교인이 3만 7000명에 불과했으나 이승만이 물러난 1960년에는 114만 명으로 증가했다. 아시아에서 유래 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품은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는 비전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승만을 깊이 연구한 이들은 한결같이 이 대통령이 주장한 반공 노선은 기독교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무신론인 공산주의에서 기독교인과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반공을 강하게 주장했다.
따라서 이승만 이후로 ‘반공 기독교’는 한국교회 내에 강한 전통으로 자리했다. 오늘날 역시 탈북자 구출 사역, 북한 민주화를 향한 투쟁에 상당수 교회와 기독교인이 앞장선다. 이승만이 세운 전통을 여전히 잇고 있다.
흔히 이승만을 모세에 비유한다. 실제로 이승만과 모세는 유사점이 많다. 젊은 모세가 노예 생활하던 민족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하고 피신했듯이 이승만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했다. 모세가 이집트 학술과 히브리인 신앙을 두루 섭렵했듯이 이승만도 동양과 서양 학문에 통달했다. 사적인 부분 역시 비슷한 점이 많다. 모세와 이승만은 모두 고령에 최고 지도자로 취임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미디안 여인이었고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 여인으로 타 민족을 아내로 맞았다.
두 사람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며, 안타깝게도 가장 간절히 바라던 기도응답을 생애에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멀리서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승만 역시 자유롭고 번영한 조국을 소원하며 일평생 기도했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조국은 이승만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끝내 발전을 이룬 조국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구한 기도는 후손들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계속>
자료제공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6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