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10)] 범죄 만연한 도시에 복음의 역사 일으켜

등록날짜 [ 2013-12-10 09:49:57 ]

10대에 예수 영접한 뒤 공장 다니며 독학, 목회자로 소원해
신학교 학장으로 생애 마칠 때까지 복음의 열정 식지 않아

<사진설명> 사무엘 채드윅.

1860년 9월 16일, 사무엘 채드윅(Samuel Chadwick)은 영국 랭커셔 번슬리에 있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번슬리에는 제조업 공장이 많아 분주했다. 채드윅은 여덟 살 때, 돈을 벌고자 방직공장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노동현장에서 쌓은 경험은 채드윅이 나아갈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후에 채드윅은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자랄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노동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섬길 사역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반을 다졌다고 고백했다.

열 살이 된 채드윅은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했다. 채드윅이 가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기념 강연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사무엘 콜리가 설교했다. 말씀을 들은 채드윅은 ‘내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채드윅의 영적 삶에 불이 붙었다. 늘 기도에 전력을 기울였다.

죄에서 거듭나게 하는 목회자로
1875년, 채드윅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 그 후 1년 정도 진지하게 숙고하며 기도로써 하나님이 주신 깊은 뜻을 되새겼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에 휩싸였다. 채드윅은 체력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고,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에 가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채드윅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마음먹고, 하루에 12시간씩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5시간은 집에서 독학했다.

채드윅은 7년 동안,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기도로 준비했다. 드디어 1881년, 채드윅은 스택스테즈 부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정식 사역자로 임명받았다. 이 지역은 당시 죄로 만연했고 복음에는 전혀 무관심했다. 채드윅은 작은 소그룹을 만든 다음 그룹별로 말씀을 전했고 그들을 두고 날마다 기도하며 영적 소생을 일으켰다.

어느 날 마을에서 주정꾼으로 알려진 로버트 하머라는 사람이 교회모임에 나타났다. 하머는 사람들 사이에서 ‘범죄의 원흉’으로 불릴 만큼 험악했다. 그러던 사람이 그날 저녁 결신자 카드에 사인하고는,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하머는 다른 신자와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채드윅은 요한복음 11장과 12장을 읽으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채드윅은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 “바로 이거다! 우리는 나사로가 되어야 해!” 하나님은 채드윅이 구한 기도를 들으셨다. ‘범죄의 원흉’이던 사람이 채드윅에게는 나사로로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아 사망에서 다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교회는 채드윅에게 조언을 받아 다양한 형태로 전도 활동을 했다.

“여러분은 빈 교회가 어떻게 사람들로 채워지는지 궁금하십니까? 답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영적으로 죽어 있는 나사로를 데려오세요.”

순수하게 예수만 전하는 목회자
1883년부터 1886년까지 채드윅은 디즈버리대학에 재학하여, 책을 많이 읽고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엄밀하고 세심하게 학문적 체계를 세워나갔다. 채드윅 생애에서 유일하게 공식 교육을 받은 시기였다. 채드윅은 자신의 최선과 최고를 주님께 드려 쓰임받고 싶어 했다. 채드윅이 지닌 고민은 전도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1890년 감리교회 총회는 사무엘 채드윅에게 정식으로 안수하고 리즈에 있는 웨슬리교회에 파송했다. 그곳에서 채드윅은 3년간 목회했다. 그 후 런던으로 가서 1년을 지내고 다시 1894년에 리즈로 돌아왔다. 채드윅은 13년간 리즈에서 사역하며 죄인들 삶에 나타난 은총이라는 이적을 지켜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리즈에서 13년간 풍성한 사역을 마친 후, 채드윅은 요크셔 셰필드에 있던 클리프대학(감리교신학교)에서 강사로 초빙하겠다는 제의에 응했다. 채드윅은 이 학교에서 5년간 교수활동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기간에도 채드윅은 복음 전도집회와 사이스 요크셔에 새롭게 세울 선교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1913년 채드윅은 클리프대학에서 학장 자리에 올랐다. 장차 하나님 사역을 감당할 학생들을 훈련하고자 여러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채드윅은 2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기도하는 방법과 성령을 의지하는 법, 복음을 전하는 법 등 비신자를 찾아 그리스도께 이끄는 실제적인 내용을 가르쳤다.

한번은 한 목회자 후보생이 거의 탈락할 지경에 처했다. 이유는 키가 작아서였다. 채드윅은 후보생 옆에 서서 위원회에 항변하며 당당하게 옹호했다.

“위원회가 주장하는 유일한 결함은 다리가 짧다는 사항인데, 도대체 긴 다리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감리교 형성기의 사역자 중 소위 ‘지적인’ 목회자들은 ‘새로운 복음’을 찾고자 노력했다. 채드윅은 십자가에서 예수가 흘린 보혈 이외에 새로운 복음은 없다며 이들을 반대했다.

채드윅은 미국을 몇 차례 방문해서 무디가 있던 노스필드나 위노커 레이크성경협회에서 합심하여 사역했다. 채드윅은 많은 사람이 거룩한 삶을 갈망하게 영감을 전했으며 영적인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두게 했다.

1932년 10월 16일, 채드윅은 생을 마감하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갔다. 채드윅은 언제나 성령께 인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십자가 보혈만 전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일처럼, 사람들에게 예수 생명을 전하는 데 전심전력을 쏟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는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64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