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11)] 세상과 구별하는 방법은 ‘기도’에 있다

등록날짜 [ 2013-12-18 09:06:11 ]

그리스도인은 ‘기도’, ‘성령 충만’, ‘예배’가 필요함을 강조
자유주의 사상이 파도치는 미국 땅에 순수 복음주의 외쳐

<사진설명> 에이든 윌슨 토저.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는 1897년 4월 21일 미국 라 호세(La Jose) 서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작은 농촌에서 태어났다. 여섯 형제 중 셋째인 토저는 초등학교 교육만 받았다. 토저가 살던 집 근처에는 교회가 없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교회가 있었지만, 어린 토저가 다닐 수는 없었다.

1912년, 토저가 15세 때 애크런 도시로 이사했다. 토저는 일자리를 얻고 다양한 직업을 접한다. 그는 애크런에 온 후로 동생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했다. 3년 정도 지난 어느 날, 토저는 어떤 전도자가 한 말에 깜짝 놀랐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법을 모른다면, 단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집으로 돌아온 토저는 다락방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때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만났다. 설교로만 듣던 십자가 사건이 믿어졌다.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회개한 그의 마음엔 평안이 가득했다. 이 회심 사건 이후 토저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 토저는 하나님을 알고 싶은 지적 갈망과 경건한 굶주림으로 가득 찼다. 성경을 읽고 기도할 장소가 필요했다. 토저는 지하실에 있는 보일러 뒤 작은 공간을 기도 장소로 택했다. 이곳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이 그의 평생 습관이 되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첫 반응은 ‘전도’다. 토저는 가족부터 전도했다. 먼저 어머니를 예수께로 인도했고, 훗날 아버지도 하나님 품으로 인도했다.

토저는 1918년 4월 26일, 에이다 세실리아 포츠(Ada Cecelia Pfautz)와 결혼했다. 토저는 결혼 전부터 직장에서 휴가를 얻어 전도여행을 다녔다. 가가호호(家家戶戶) 다니면 전도하거나, 천막 집회를 열기도 했다. 몇 주에 걸쳐 전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토저의 영혼 구원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레이스 교회는 토저의 이런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토저가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 후, 토저는 기독교선교연합 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hurch) 소속이 됐고, 1921년 모건타운 기독교선교연합 교회의 사역자로 임명받았다.

토저는 사례비를 독특한 방식으로 받았다. 교회에서 매월 지급하지 않고, ‘자발적 제공’이라는 방식으로 공급받았다. 토저는 이를 두고 훗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신앙 훈련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하나님만을 의지한 목회는 교회 성장이라는 열매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토저의 명성은 주변 여러 곳으로 퍼졌다. 청년집회, 사경회, 문서사역 등으로 점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인디애나폴리스 교회, 시카고 교회, 캐나다 애버뉴 로드 교회는 토저 목사가 사역한 곳이다. 옮기는 교회마다 부흥의 물결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마지막 사역지인 캐나다 애버뉴 로드 교회는 토저 목사를 청빙하려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모두 동원했을 정도였다.

토저 목사의 사역지마다 부흥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한 결과다. 토저의 저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도’, ‘성령 충만’, ‘예배’가  그것이다.

토저는 ‘기도는 부흥의 뿌리’라고 정의했다. 토저의 친구인 데이비드 팬트는 “토저는 책상에서 보낸 시간보다 무릎을 꿇고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라고 증언했다. 토저는 습관화한 종교생활처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또 기도하지 않아서 교회가 세상과 교회 안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기도하는 삶은 먼저 개인 신앙에 부흥을 가져오며, 자신의 죄악을 자복하고 회개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변화된다고 강조했다.

토저는 개인적 부흥이든 교회적, 사회적 부흥이든 먼저 성령 충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토저는 “성령은 도덕적 불꽃이다. 도덕적 불꽃이란 성령의 거룩성을 말한다. 다음으로 성령은 영적 불꽃이다. 성령만이 우리의 예배를 진정한 영적 수준으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의지의 불꽃이다. 성령은 비인격체가 아니라 주권적 의지가 있으신 인격체를 지닌 하나님이시다”고 했다.

토저는 예배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과 지극히 개인적이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에 있는 행위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이다.” 토저는 형식적인 예배를 거부했다. “주일만 거룩한 날, 나머지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모든 삶을 예배로 드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토저는 세속적인 문화, 인본주의적 예배,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예배는 분리해야 한다고 했다.

토저는 위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목회자에게 필요한 요소로 설교가 있다고 했다. 설교하려 할 때 가장 필요한 일이 ‘기도’라고 하였다. 기도의 연못에 푹 잠겼다 나온 설교가 토저의 설교였다.

1963년 5월 12일 주일, 토저 목사는 66세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토저 목사가 살던 시기 미국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 교회 안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이 휘몰아쳤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경제 대공황과 사상적 이데올로기의 양극화 현상이 극에 달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처럼 시대정신을 흔들고 깨우는 종으로 토저 목사를 쓰셨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6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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