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27)] 건국의 길, 그 지난한 여정

등록날짜 [ 2013-08-07 10:01:02 ]

소련군, 일본 항복 직전에 북한으로 진격


<사진설명> 6.25전쟁 발발 직전 38선 초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사망자는 7만 명 정도에 달했다. 일본 지도층 내부에서는 민족이 멸절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논의를 진행했다. 원폭을 당하기 전에 항복하자는 주장도 거세졌다.

그 무렵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시간을 계산했다. 최대한 참전 시간을 늦추려는 기본 전략을 폈다. 일본이 힘을 다 소진한 다음에 쳐들어가서 희생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본래 소련군은 8월 11일에 전쟁을 시작하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종전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판단에 8월 9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바로 그날,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한 번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일본이 미국에 항복을 통보했다. 일본이 항복을 통보한 그날 곧바로 항복이 선포되었다면, 우리나라 역사도 분명히 달라졌을 터이다. 그런데 항복 조건으로 천황제 처리 여부가 복잡한 문제로 떠올랐다. 천황제를 처리하려는 미국과 일본이 주장하는 의견이 달랐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지닌 권위를 최대한 유지하려고 했다. 천황 한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 때문에 미국과 일본이 협상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미국 내에서는 천황은 전쟁 범죄자이므로 사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다. 하지만 지일파들은 천황을 제거하면 일본을 점령한 뒤에 통치하기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인들 마음을 얻고자 천황제를 유지하자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히로히토 천황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일본과 미국이 줄다리기하는 사이에, 소련은 만주로 쳐내려왔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군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미국은 한반도를 둘로 나누어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진행하고자 제의했다. 그 업무 분담선이 북위 38도선이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붉은 군대와 연합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작한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 주었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항간에 위와 같은 성명서를 보고 소련이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이라고 가르치는 한심스러운 책도 있고 교사도 있다. 해방 이후 소련과 북한이 벌인 행적을 추적하는 데에는 기본 전제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점이다. 목적을 달성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 방법론으로 볼 때, 성명서니 선언이니 하는 약속은 그네들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당시 소련은 혁명과 숙청,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소련군을 지탱할 식량 보급 자체도 어려웠다. 따라서 붉은 군대를 유지하고 전후 복구를 하려면 약탈을 해야 했다. 소련은 세계대전으로 획득한 모든 점령지에서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인이 소유하던 재산을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거두어 갔다. 풍작이던 1945년, 추수 양곡을 거두어들였다. 세계적 규모인 압록강 수풍 발전소에 설치한 독일제 발전기 5대, 흥남 비료 공장 일부 시설, 대유동 광산 금석, 철산 광산 모나즈 광석도 소련으로 실어 날랐다. 심지어 38선 경계 목적으로 세워놓은 초소 비슷한 목제 보호막까지 거두어 갔다.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역할을 분담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하지만 소련은 슬쩍 38선을 넘어 개성까지 점령했다. 미군이 상륙하자, 개성에서 철수하며 인삼 다량과 은행에 보관한 현금을 모두 가져갔다.

소련군은 곧장 38선 이남과 이북 간 인적 왕래, 물적 교류, 통신을 모두 차단했다. 8월 24일과 25일 남북 간 연결 철도(경원선과 경의선)를 차단했고, 38선 지역에 경비부대를 배치하여 남북 간 도로통행을 통제했다. 9월 6일에는 38선 이남 지역과 전화, 전보 통신을 차단하고 우편물 교환을 금지했다.

소련군은 38선 경계 초소를 지키는 병력을 증강하여 38선을 넘는 남북 간 통행 통제를 강화했다. 12월 중순에 이르면 38선은 마치 적대국 사이를 가로지르는 국경선처럼 자리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4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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