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등록날짜 [ 2013-10-08 10:57:23 ]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 뛰어난 머리로 오직 목회만 전념
영적 유익을 우선시하며 신앙에 어떤 타협도 허용치 않아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州) 이스트 윈저에서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 목사와 어머니 에스더 사이에 태어난 열한 자녀 중 다섯째로, 외아들이었다.

에드워즈는 훌륭한 청교도 가문 출신이다. 특히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인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는 노샘프턴교회를 이끌었으며, 코네티컷 밸리에 소재한 여러 교회에서 영적 리더로 존경받았다. 에드워즈의 아버지 역시 경건한 목사였다.

덕분에 에드워즈는 어릴 때부터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두는 훈련을 받았다. 또 에드워즈는 열한 살 때 자연계와 곤충을 관찰해 소논문을 썼고, 열두 살에는 자기 영혼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한 조숙한 천재였다.

영적인 부분을 향한 관심은 또래 소년들보다 앞섰다. 에드워즈는 시간을 정해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했다. 그와 친한 몇몇 친구는 에드워즈가 숲 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함께 영적인 문제들을 토론하고 기도했다고 전했다.

1716년, 에드워즈는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예일대학에 입학했고, 1720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신학 심화 과정을 이수했다. 에드워즈는 예일대학에서 열일곱 살 때 성령을 체험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교리에 회의를 품었다. 하지만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읽고 나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로써 신학적 회의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1723년 1월 12일,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결심문 70개를 작성했다.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결심문이 하나님 뜻에 일치하는 한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은혜로 내가 이 결심문을 지킬 수 있게 능력 주시기를 겸손히 간청합니다.”

결심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살자. 내 생애 최후라고 가정할 때, 하기가 꺼려지는 일이면 절대로 하지 말자. 고통스러울 때는 순교하는 고통과 지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1727년 2월 1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외할아버지인 솔로몬 스토다드를 돕는 협동 교역자로 사역했다. 에드워즈는 같은 해 7월 20일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 여인은 많은 신자에게 귀감을 주는 믿음의 여인이었다. 이후 에드워즈와 피에르폰트 사이에 자녀 11명이 태어났다. 에드워즈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한 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자녀 역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게 훈련했다. 에드워즈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가족과 약 1시간에 걸쳐 대화하며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에게 자상히 가르쳤다. 에드워즈는 종종 금식하며 영성 개발과 신앙 상태를 점검했다. 1729년 2월, 외할아버지인 솔로몬 스토다드가 운명하여 그가 이끌던 교회를 에드워즈가 이어 맡아 목회했다.

당시 미국은 도덕성과 경건성이 혼미해지고 영적 관심이 점차 식어 갔다. 1731년 7월, 보스톤 대중집회에 에드워즈 목사가 초청받아 설교했다. 이 설교가 영적 대각성 운동에 불을 지폈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회개 운동에 동참했다. 에드워즈 목사가 담임하던 노스햄턴교회도 비약적으로 부흥했다.

성령이 역사하자 악의 육적 훼방도 축복과 더불어 나타났다. 교회 중직인 재력가의 자녀가 외설스러운 책을 읽었는데 에드워즈 목사가 그 아이들을 지적하고 꾸중했다. 이에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에드워즈 목사는 설교 말씀으로 성경 그대로를 열어 보였으며, 곧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했다.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성령을 체험했다. 한편,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게 하는 방침 때문에 신학적 논쟁과 말다툼이 일어났다. 결국 교회 정회원 230명이 에드워즈가 사임하길 찬성했고, 반대자는 오직 23명뿐이었다. 이로써 에드워즈는 24년간 사역해 온 교회에서 쫓겨났다.

에드워즈는 아내와 아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을 이끌고 매사추세츠 주, 스토크브리지로 옮겼다. 그곳에서 에드워즈는 인디언을 대상으로 선교 사역을 했다. 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하나님은 필요한 부분을 채워 주셨다.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여러 일과 의무에서 벗어난 그는 말씀 연구와 글쓰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스토크브리지에 머무는 동안(1751~1758년) 에드워즈는 자신을 대표할 저서를 여럿 집필했고, 그중 몇 권은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됐다. 1757년 에드워즈는 프린스턴대학 총장으로 임명받아 1758년에 정식 취임했다. 이때 그 지역에 천연두가 유행했는데, 예방접종을 하였으나 잘못 감염되어 그해 3월 22일에 운명했다.

에드워즈가 사역할 당시 어린아이였던 한 사람이 자라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회상하였다.

“사람들은 2시간 이상 걸리는 설교 시간에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앉은 채 경청하였다. 진리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중력으로 성도의 마음을 압도했다. 거의 설교를 마칠 즈음에는 그렇게 빨리 끝마치는가 하여 다소 실망하는 듯하였다. 특히 에드워즈가 전하는 설교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그들이 받을 형벌이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하고 가혹하여 회개치 못한 사람들을 회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35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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