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13)] 죽기까지 “예수 천당”을 말한 순교자

등록날짜 [ 2014-01-07 09:50:17 ]

성령이 나타내는 이적과 역사로 전도하고 곳곳에 교회 세워
일제 치하 옥고와 고문에도 끝까지 예수만 말하다 순교해

최봉석은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평남 강동창에서 창장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서장과 같은 직위다. 최봉석은 16세까지 구학문을 익혔다. 1885년 평양 감사 민영휘 수하에서 비서로 일했다. 그 후 평양 감사 아래 감찰 직을 맡았다.

최봉석이 태어날 무렵 조선은 바람 앞에 놓인 촛불 신세였다. 열강 틈에서 펼친 쇄국정책으로 백성은 심히 궁핍하게 살았다. 게다가 정부 관리는 부패했고, 지방 관리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이들은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어느 날 최봉석의 부친과 현감이 언쟁을 벌였다. 흥분한 현감이 최봉석의 부친을 구타하려는 기세를 보일 찰나, 최봉석이 달려들어 현감을 폭행했다.

이 때문에 최봉석은 국고금 3만 량을 횡령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반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평북 삭주로 유배됐다. 압록강 건너 중국 사람들이 보이는 삭주는 1896년에 교회가 설립되어 복음이 점점 퍼지고 있었다. 최봉석은 31세가 된 1900년에 삭주읍에 도착했다.

삭주교회 개척 구성원으로 백유계(白留溪)라는 한의사가 있었다. 백유계는 병 고치러 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그중에 최봉석에게도 예수를 전했다. 최봉석은 둘째 아들을 낳을 무렵 백유계에게 도움을 받았다. 백유계는 최봉석에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설명하며 전도했다.

최봉석은 유배형을 받은 죄인이었다. 죄인인 신분으로 예수를 믿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죄인이기에 예수가 필요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그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복음에 감동했다.

최봉석은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전력을 다하는 성품이었다. 백유계가 전도해 삭주교회에 등록했다. 최봉석이 33세가 되던 1902년, 최봉석은 점차 예수가 피 쏟은 사랑에 깊이 감동해 예수 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1904년, 최봉석은 삭주교회 집사로 임명받았다. 또 성경 매서인(賣書人-전도하며 성경책을 파는 사람)을 자처해 김상준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났다. 벽동, 강계, 후장, 초산, 창성, 구성을 비롯해 평북 산악지역과 압록강 건너 만주 통화현에 이르기까지 전도하여 4년간 30여 교회를 개척했다.

어느 궁핍한 농가에 갓 시집온 새댁이 송아지를 살려 달라고 최봉석에게 부탁했다. 최봉석이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열성에 그 집 사람 모두 감동하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기도로 죽었던 송아지가 다시 살아났다. 최봉석은 사람들에게 외쳤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저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

30여 교회가 수월하게 세워지지는 않았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긴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믿어 마귀 권세를 굴복하게 하고, 승리하신 예수를 상징하는 교회를 세웠다. 최봉석은 자신을 송두리째 불태워서라도 예수를 전하는 도구가 되길 원했다.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가 최봉석에게 일어났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최봉석을 최권능이라고 불렀다.

최봉석은 1907년 벽동읍 교회에 조사(助師)로 부임하여 이후 8년간 목회했다. 이후 평양신학교를 7년 만에 졸업했다. 세 번이나 낙제하자 평양신학교 마포삼열 교장은 최봉석을 불렀다. “최봉석 조사는 공부를 너무 소홀히 해서 걱정입니다.” 이 말에 최봉석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세상에 마귀가 우글우글한데 예수 탄(彈)을 쏴야지 딴 총알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불발탄은 안 돼! 신학 탄은 비둘기에게 콩알을 쏘는 거다.” 최봉석이 조직신학, 구약신학, 신약신학 점수는 형편없지만, 노방전도 점수만은 100점이었다.

1913년, 최봉석은 평북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4년에 남만주 지방 전도목사로 파송됐다. 최 목사는 길을 가다가 무엇이 어른거리기만 해도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다. 예수라는 말만 해도 중국 사람들은 다 알아들었다. 이 한마디가 사람들 골수를 쪼개고도 남았다.

최 목사의 외침은 뇌성처럼 영혼을 울렸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곳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믿음의 역사로 말미암아 만주에 교회를 개척했다. 12년 동안 교회 50개를 세웠다.

1926년에 평양으로 돌아와서도 복음전도를 쉬지 않았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교회 70여 개를 세웠다. 최 목사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전도의 사람, 사랑의 사람, 순교의 사람이었다. 바울처럼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다. 바울처럼 예수로 충만했다. 바울처럼 그 몸에서 예수를 나타내는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최 목사는 평북 서천군에 있는 선미도라는 섬에서 전도하며 기도했다. 최 목사는 순교할 각오를 매일 다짐하며 또 한 번 예수를 외칠 기회를 조용하게 기다렸다. 그곳에서 일본인 형사에게 체포된 최 목사는 평양경찰서로 호송되었다. 오윤선 장로, 채정민 목사, 주기철 목사 역시 잡혀 들어왔다.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잡혀 온 사람들은 날마다 심한 구타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다. 신앙을 꺾으려는 마귀역사는 무자비했다. 그런데도 최 목사 입에서 “예수 천당!”이라는 외침은 떠나지 않았다. “내 몸에는 예수 천당이 꽉 찼단 말이요. 내 전신 어디든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오듯이 예수 천당이 나올 터이니까.”

1940년 최권능 목사, 주기철 목사, 이인재 조사, 방계성 장로, 안이숙 선생 등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이들은 평양경찰서 유치장에서 평양 형무소로 넘어갔다.

최권능 목사는 옥고 6년째로 접어드는 1944년 4월을 맞이하면서부터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주님이 계신 곳이 차츰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형무소 소장은 최 목사 집에 병보석을 통고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지 4일 후에 최권능 목사도 7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으로 옮겨 갔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6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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