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3-04 14:25:50 ]
<사진설명> 제3대 국회의원.
시간은 폭군이다. 시간이 휩쓸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형체를 잃는다.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진다. 싱싱하고 화려하던 청춘이 가고, 늙고 병든 노년이 찾아온다. 힘차게 솟아오른 태양조차 마지막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황혼을 빚어 내고는 어둠만이 남는다.
한미 동맹은 이승만의 황혼이었다. 스러지는 햇살이 힘을 다해서 세상을 노을빛으로 물들이듯, 이승만이 지닌 천재성과 탁월성이 찬란한 광채를 발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황혼은 스러지고, 어둠만이 남았다.
한미 동맹을 맺은 1954년, 이승만은 우리 나이로 여든이었다. 아무리 천재고 탁월하더라도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노년을 맞은 이승만은 실책을 연발했다. 세상을 샅샅이 살피던 눈이 흐려졌다. 조국을 부지런히 누비던 발걸음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아무래도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이승만을 주변에서 보좌하던 인물들은 1954~1955년을 고비로 이 박사의 총명함이 현저히 둔화됐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이 시기 이후 이승만은 외교와 정치 면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자유당은 이승만이 노년을 불행하게 마무리하는 데 일등 공신 노릇을 했다. 이 대통령은 국회 내 기존 정당들과 불편한 관계에 놓여서 1952년에 자신이 주도할 정당을 창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승만은 정당 이름을 본래 ‘노농당(勞農黨)’으로 계획하다가 자유당으로 바꾸었다. 최초에 계획한 이름이 말해 주듯이, 이승만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대변하는 정당을 세우려고 했다. 자유당을 발족하고 8년간 집권 정당에 올랐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위한다는 창당 취지는 어느새 흐릿해졌다. 자유당은 대통령을 내세워 잇속을 챙기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부패 정당으로 변질했다.
노년인 이승만은 자유당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 1954년부터 자유당의 만행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해 5월, 3대 민의원 선거를 진행했다. 선거는 난장판이었다. 경찰이나 폭력단이 방해하거나 간섭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한마디로 부정 선거였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간섭에 항의하는 사람에게 “소송에 실패한 자가 원통하다고 불평한다”라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대체로 순조롭게 치러졌다”고 치하했다.
이 장면은 이승만이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인(人)의 장막’이었다. 고령인 대통령을 옹위하던 세력이, 대통령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혹은 연세 드신 국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구실로, 대통령과 세상을 격리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볼 때, 측근들이 둘러친 장막으로 대중과 격차가 벌어져 정치 지도자가 몰락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자유당은 1954년 선거에서 불법을 저지른 끝에 원내 절대 다수당을 차지했다. 이승만은 부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는 불법에 면죄부를 준 처사나 다름없었다. 자신감을 얻은 자유당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것이 3선 개헌이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3선 하는 일을 금했다. 규정상 대통령을 두 번 지낸 이승만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1954년 11월 17일, 제3대 국회는 개헌안을 둘러싼 민의원 표결을 진행했다. 재적 203명 중에 찬성이 135표였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재적 인원에서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데, 135표는 한 표 부족한 수치였다. 따라서 국회는 개헌안 부결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틀 후, 국회는 부결에서 가결로 뒤집어 선포했다. 이때 동원한 방법이 사사오입(四捨五入-넷 이하는 버리고 다섯 이상은 열로 하여 원 자리에 끌어올리어 계산하는 법=반올림)으로 203명 중 3분의 2는 정확히 135.333… 인데 소수점 이하는 버리고, 근사치인 135명이 정수라는 논리를 적용했다. 우리 국회를 촌극으로 만든 논리였다.
결국, 개헌안이 통과되고 이승만은 계속해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리한 개헌으로 후유증이 컸다. 독립 운동가로, 건국의 아버지로 국민 대다수에게 존경받던 이승만은 권력에 눈먼 독재자로 비쳤다. 국민이 표출한 거부감은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승만 정권을 반발하는 무리는 자유당 내에서도 존재했다. 소장파 위원 14명이 3선 개헌에 반대해서 탈당했다. 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동원한 자유당에 대해 야당은 연합을 이루어 대항했다.
이후 자유당 탈당파 14명, 장면이 이끄는 흥사단 세력, 민주국민당 후속 인물들이 1956년 9월 19일 민주당을 창당했다. 따라서 자유당과 민주당이 양당 구도를 이뤘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7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