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4-15 16:29:09 ]
조국을 위해 개인이 지기에는 너무도 힘겨웠던 십자가
<사진설명> 이승만 박사 장례 행렬. 국립묘지로 향하는 길 양 옆에는 서거를 애도하는 수많은 시민이 서울시청에서 남대문까지 연도를 가득 메웠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건국 대통령이 외국 요양원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하와이에서 진행된 영결식에는 한국과 미국 인사들 그리고 교포들이 참석했다. 그중에 보스윅이 있었다.
보스윅은 이승만과 50년 지기였다. 일찍이 그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상해에 갈 때, 중국인 노동자 관을 실은 배에 이승만과 임병직을 태워 밀항하게 도왔다. 이승만이 쓸쓸한 말년을 맞이했을 때 역시 찾아와 주었고, 돌아가는 길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프란체스카 여사의 손에 돈을 쥐여 주기도 했다.
1965년 7월 27일 오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전 영결식을 진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를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했다.
정일권 총리는 이승만 대통령 휘하에서 육군 참모 총장으로 6.25 전쟁을 지휘했었다. 이승만에게 “단독 북진을 결행하여 38선을 넘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그가 마침내 사선을 넘은 대통령의 영결식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건국과 호국 대통령 이승만을 보내는 대통령 박정희의 조사는 거인을 향한 거인의 마지막 인사였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 근대의 상징적 존재로서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의 진세 인연을 끊어 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중략) 일찍이 대한제국이 기울어 가는 정세를 보고 용감히 뛰쳐나와 조국의 개화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은 일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습니다.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 망명생활을 한 30여 년은 문자 그대로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 광복을 맹세하고 원하던 것 역시 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향연이었습니다. (중략) 어쨌든 박사께서 개인적 민족적으로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던 사실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과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 정신과 반공 투쟁을 향한 선구자로서 길잡이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만리 쓸쓸한 해빈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중략) 생전에는 손수 창군하시고 또 그들을 일으키사 공산 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리던 그 국군 장병들의 영령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이 헤쳐 나갈 다난한 앞길을 열어 주시는 힘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나 정확하기로 정평이 난 인물들이다. 필자의 소견으로, 박정희는 글로써 이승만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생각해 보면 파란만장한 생애였고 장엄한 애국이었다. 말년에 당한 실정은 거대한 생애에서 일부였을 뿐, 그것으로 전체를 덮을 수는 없다.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기독교적 용어로 이승만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조국을 위해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린양. 실로 그가 져야 했던 십자가는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한성 감옥에서 당한 고문, 유학 시절의 가난, 기약 없는 망명생활, 건국 과정에서 뒤집어쓴 오명, 처참한 전쟁, 약소국의 서러움, 말년에 저지른 고통스러운 실책, 태평양에서 저물어야 한 최후의 고독.
한 개인이 지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십자가였다. 조국을 위한 거대한 십자가를 지고 이승만은 끝까지 신앙과 애국의 길을 갔다.
양자 이인수가 기억하는 이승만의 유언은, 그가 해방 후 국민에게 자주 설교하던 신약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이었다. 세상살이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세월에,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은 날마다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게 하소서.”
마지막 순간조차, 그의 기도에는 우리 민족이 살아 있었다. 그는 기도로 한성감옥에서 다시 태어났고, 기도로 독립운동을 이어왔으며, 기도로 대통령 직을 수행했고, 기도로 마지막 생을 마감한 그리스도인의 참모범이 되었다.
<끝>
위 글은 교회신문 <38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