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03-12-29 15:31:47 ]
완도 아가씨가 참말로 부지런하네. 학교졸업하면 우리 며느리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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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낮엔 직장에, 밤엔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때 자취 집 근처 야채가게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이 진담이 돼서 그 아주머니의 맏아들과 결혼을 하게 됐다. 내 나이 스물 셋, 남편의 나이 서른 살 때 일이다. 처음 정식으로 혼담이 오갈 땐, 신랑감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썩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질적으로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친정아버지가 술로 인해 가족들 고생을 많이 시키셨기에 술 못 마시는 사람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이서 열심히 일하면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신혼 초엔 시댁에서 살면서 장사 일을 도왔다. 스물세살 새댁이 고된 장사일 때문에 지치고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남편은 총각 때의 습관대로 직장을 마치면 당구장에 가서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허다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자립심이 강한 나로서는 부모에게 의지하는 남편의 안일한 생활태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남들은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 나는 ‘무능력한 남편 만나 젊은 나이에 이 고생하며 살아야하나 ‘한탄하며 하루하루를 실망과 좌절 가운데 보냈다. |
바로 그 무렵, 주님께서는 S교회 권사님을 통해 나를 교회로 인도해주셨다. 시어머니를 전도하시다가 시어머니 대신 며느리인 나를 전도하신 것이다. 난생 처음 교회에 가던 날 왜 그렇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리던지...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던 차에 마음껏 울며 신세한탄 할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가 차츰 설교를 들어보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았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도 꼭 만나봐야겠다는 마음에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혼자서 부흥회 등 은혜롭다는 곳은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뜨거운 체험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4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아들 둘이 태어났다. 남편이 가져다 주는 적은 월급으로는 도저히 가정을 꾸려나갈 수가 없어 파출부 일을 했다. 시댁장사 도우랴, 파출부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고달픈 삶에 지친 나는 남편을 볼 때마다 무능력을 탓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편이 홧김에 그릇을 하나 집어던지면 나는 부엌세간살이를 모두 집어던져 깨뜨려버렸고, 남편이 손 찌검을 하려 하면 빗자루를 가져와서 대들었다. ‘남편에게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데..’ 수없이 후회도 해보았지만 어느 새 울화증이 되어버린 가슴앓이가 한번 폭발하면 나도 나 자신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삶의 회의가 짙어질수록 하나님을 만나고픈 영혼의 열망은 더욱 간절해졌다. |
찾으라 그리하면 찾으리라 하신 하나님! 그분은 애절한 나의 소원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내 영혼에 영원히 잊지 못할 체험을 주셨다. 그것은 결혼 4년 만에 대전으로 이사했을 때였다.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40일 작정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지막날, 기도하는 중에 환상인 듯 꼭 맞잡은 나의 두 손이 보였다. 곧 손이 점점 커지더니 엄지손가락이 내 시야를 가릴 만큼 커져버렸다. 그 순간 “지금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나의 마음은 불처럼 뜨거워졌다. 하나님이 정말 확실히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 체험되자 나는 너무나 좋았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만나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걸을 때도, 차를 탈 때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후, 밉기만 하던 남편이 ‘내가 이 사람에게 시집왔으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지’라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뿐 여전히 힘든 환경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어댔다. 성격이 급한 남편도 참지 못해서 결국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결혼한 지 7년 되었을 무렵 서울로 이사를 했다. 남편이 애써 부은 적금과 보험을 해약한 돈으로 친구와 다단계 판매사업을 시작했는데 6개월만에 빈 손 들고 나왔다. 보증금 백만원짜리 초라한 월세방 한 칸을 얻어 네 식구 짐을 풀고 내 영혼과 육신 모두 곤고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하나님께서는 부산과 대전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던 김홍태, 김정란 집사 부부를 통해 나를 연세중앙교회로 인도해주셨다. |
연세중앙교회 담임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엔 항상 예수님이 나의 죄를 사해주시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진실한 사랑의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또한 예수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내 영혼의 때에 가게 될 천국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도! 이 세상에서는 비록 힘들고 어렵게 살지만 내 영혼의 때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리라. 이 세상의 내 집은 너무나 초라하여 보잘것없지만 천국의 내 집은 없는 것 없이 아름답게 꾸미리라. 영혼의 때를 위한 소망이 불일 듯 일어났다. |
그리고 예배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강단에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으로 화답하면 39도까지 열이 올라 펄펄 끓던 아들녀석의 몸에서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열이 뚝 떨어졌고, 울화증으로 인해 약간만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아프던 가슴병, 부인병 등도 언제 고침 받은 줄 모르게 깨끗이 나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믿는 만큼 그대로 역사하는 것을 분명히 체험한 후로는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려고 하니 뜻밖에도 남편이 핍박을 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지금껏 내가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고 상처를 입혔던 것과 똑같이 남편도 욕을 하고 때리며 내 자존심을 있는 대로 짓밟았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상처 받은 것의 배로 남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텐데 기도를 많이 하던 때라 그런지 남편이 “개 같은 년”이라며 심한 욕을 했는데도 “화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떠오르면서 화를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삭일 수 없어 교회에 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 더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남편을 주의 심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며 “하나님, 저 개 같은 년이지요?” 라며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더니 가슴이 시원해졌다. |
그렇게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울화증을 이기고 났더니 다음에는 남편이 아무리 심한 욕을 퍼부어도 신기하게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옛말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했는데 나는 내 버릇을 고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함부로 대하던 나의 못된 버릇을 고치신 것이다. 그 후 내가 변화된 모습을 본 남편은 교회에 등록하고 열심히 예배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핍박하던 남편이 교회에 잘 나오니 “이제 내 세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는 월세방 한 칸에 네 식구가 새우잠 자며 초라하게 사는 것이 싫어졌다. 육신의 소욕이 가득차니 하늘소망으로 심령가득 넘쳐나던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자꾸만 영적 생활과 멀어질 일들이 생겼다. 바로 그 시기에 기다렸다는 듯 시어머니께서 “집도 사주고 사업자금도 대줄 테니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전갈을 보내셨다. 더할나위없는 인생의 전환기라고 판단한 남편은 영적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게 “부산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며 부산행을 강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네 식구 모두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현실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시부모님이 조그마한 집을 사주시긴 했지만 아들을 믿지 못하셨던지 사업자금은 한푼도 대주지 않으셨다. 부산에서 지내는 6개월동안 남편은 좌절감으로 인해 더욱 당구와 볼링 화투에 깊이 빠져들었지만, 내겐 육신의 소욕을 철저히 버리고 오직 성령충만을 사모하며 사는 영적 생활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 이젠 돈도 싫고 집도 싫습니다. 다시 풍성한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열어주세요!”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서울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셨다. 남편의 방탕한 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기신 시어머니께서 “둘이다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던 것이다. 둘째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월세방을 얻어 지냈지만 내 영혼의 평안을 얻고보니 초막같은 그곳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부산-서울을 오가며 방황하던 남편도 곧 가정에 정착하게 되었다. |
남편이 가정에 돌아온 후에도 자존심 때문인지 교회에 대해 불평불만하고 핍박을 일삼았지만 남편이 미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신앙생활 잘 해보려던 사람이 나 때문에 시험에 빠져서 불의의 병기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이 가슴아파서 날마다 남편의 영혼을 끌어 안고 눈물로 기도했다. 나는 차츰 신앙생활에 관한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남편에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 없었는데 일하고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하면서 “여보, 사랑해요!” “수고했어요”라는 말도 하고 일부러 뽀뽀도 하고 안아도 주었다. 옷도 받아서 걸어주고 세수물도 떠주고 때론 발도 씻어주며 온갖 애교를 떨었다. 남편의 영혼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 날마다 교회에 가서 몇시간씩 남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어서 남편이 예수믿고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
내 생각엔 그런 정도로 영혼을 사랑하면 남편이 이제 돌아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어서 남편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심령에서 아주 강한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그릇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했다. 나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남편이 돌아올 만큼 준비된 그릇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이 몹시 부끄럽고 초라하여 가슴 치며 회개했다. 그 때부터 더 낮아지고 겸손해졌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만큼 남편을 변화시키시고 세워 주셨다. 1999년 4월 이웃초청 예수사랑큰잔치날, 남편이 예수를 믿겠다고 등록했다. 그 동안 교회에 나오지는 않았어도 늘 집에서 담임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어왔기에 한번 예수 믿기로 결정을 하니 그렇게 좋아하던 30년 경력의 당구, 담배, 볼링 등 세상 것을 단번에 끊어버렸다. 이제 세상 것은 재미가 없고 초라하게만 보인다니 참으로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기만 하다. 남편은 늦게 믿은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하려고 애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믿음을 보시고 차츰 사업장을 넓혀주시고 2002년도에는 독립해서 직원을 여럿 두고 건축 유리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주셨다. |
지금도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면 여전히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고,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염려스러워 저린 가슴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할 때가 많다. 올해 서리 집사로 임명받아 차량실에서 열심히 충성하며 다른 성도들의 20년 신앙을 5년에 따라잡는다는 신령한 욕심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니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말로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나와 남편이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었고 우리 가정이 주 안에서 세워질 수 있었다. 어떤 감사의 말로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없어 우리 부부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한다.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말씀으로 양육해 주시는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사랑으로 기도해주신 교우님들께도 이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위 글은 교회신문 <4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