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당이 되어야 한다니…

등록날짜 [ 2004-02-19 14:33:07 ]

이태원 점집과 연세중앙교회! 나는 이 두 곳을 통해 차례로 엄청난 영적 체험을 겪었다. 그것은 거짓과 참, 저주와 축복, 두려움과 평안, 죽음과 생명의 체험이었다.

3년 전, 고교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직장 언니가 점보러 가자고 하길래, 미신인 줄 알면서도 '재미삼아 보는 건데 어때' 하며 따라 나섰다. 이태원의 한 점집에 가서 점을 보는데 그 무당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희 외가는 조상대대로 무당 집안인데 지금은 누구도 신(神)을 섬기지 않는구나. 네 이모는 신을 안 모시려고 교회에 다니고, 외삼촌은 스님이 되고…. 그러니 네 조상들이 가만히 있겠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외가의 내력을 속속 알아 맞추는 신통력이 참 대단해 보였다. 그러더니, “네 점괘는 좋지만 조상들이 앞길을 가로막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다” 라는 불길한 말로 점치기를 마쳤다.

내가 어리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서 가려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만 현관바닥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곧이어 온 몸을 짓밟아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몰려오고 눈물까지 쏟아졌다. 꼼짝달싹 못하고 울고만 있던 내게 무당이 또 한번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넌 앞으로 무당이 돼서 조상들의 대를 이어 신을 섬겨야 해!”

기가 막혀 계속 울기만 했다. 무당이 온갖 주술행위로 신을 달래는 동안 악몽 같은 40여분이 지나고 드디어 몸이 풀렸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앞으로도 계속 아플 텐데 어린 나이에 안됐군. 못 견디겠으면 날 찾아와. 살풀이해줄 테니…”.

듣는 둥 마는 둥 재빨리 점집을 빠져 나왔다. 다시는 점집을 찾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그런데 그후 여러 날이 지났지만 무당의 말처럼 전신을 짓밟아대는 통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물 한 모금 못마시니 기운도 없었다. 약을 먹어도 소용 없었다. 말로만 듣던 무병(巫病) 같았다.

정말로 무당이 되는 것이 내 운명인지 두렵기만 했다. 사람이면서 귀신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늘 손가락질 당하는 무당.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머니껜 답답한 심정을 털어 놓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4남매를 혼자 키우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 막내딸이 무병을 앓는다는 것을 아시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지…. 이모가 신 내림을 받았더라면 내가 이 고통을 안 당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에 애꿎은 이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부터 신기가 있었던 이모는 죽어도 무당은 되기 싫다며 내림굿을 거부하셨다. 결국 귀신의 노여움으로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온 몸에 주먹만한 몽우리가 생기는 무병을 앓으며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던 중, 예수를 믿고 몸부림쳐 기도하던 끝에 몽우리들이 하나 둘 하혈로 쏟아져 내려갔단다. 뒤늦게 결혼까지 하셔서 평범한 여인의 삶에 행복해하시는 이모. 그런 이모를 원망하다니!

이모 다음으로 대물림이 이어진 분은 외삼촌이었다. 영어영문학 전공의 대학생이던 외삼촌의 눈에 신(神)이 보이면서부터 운명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거세게 몰아치는 신의 역사에 견디다 못해 스님으로, 철학관 역술인으로, 박수무당으로, 지금은 알코올중독자로 서른여덟 살의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외가의 비참한 삶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터라 신을 받느니 차라리 죽든가, 이모처럼 무병을 이겨내리라 단단히 결심을 했다. 하지만 일주일째 통증에 시달리며 울부짖다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무당 집의 문을 두들겼다.

날마다 점집으로…

무당을 보자마자 울어버렸다. 한강 고수부지로 가서 살풀이를 하고 나니 한결 통증이 가벼워졌다. 그 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무당에게 끌렸다. 무슨 일만 생기면 찾아가서 점을 치고…. 일년 반 동안 매일 같이 무당과 어울렸다. 8개월째는 제법 큰 굿까지 했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아 무당에게 물었더니 “집안에서 빨리 무당이 나오지 않으니 조상들이 들고 일어났다”며 신 내림굿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죽으면 죽었지 신을 받는 것만큼은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랬더니 일단 조상들을 달래는 진적굿이라도 하자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화를 당할 거라 했다. 그 말에 덜컥 겁이 나서 애써 모은 돈 250만원을 들여 굿을 해버렸다.

신당 하나를 빌려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밤을 꼬박 새웠다. 떡 벌어진 상을 차리고, 징, 꽹과리, 피리 등 악기를 동원하고 무당만도 몇 명이었다. 밤 2~3시 경, 굿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아버지와 할머니의 혼령이 무당에게 실렸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너희를 두고 갈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 줄 아느냐?”며 흐느껴 우는 것이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상황과 맞아떨어져 틀림없는 아버지라고 그만 믿어 버렸다.

아버지라니! 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었던 아버지라니! 비록 혼령으로 찾아왔다지만 그 품에 안기니 왜 그리 눈물이 쏟아지던지, 하염없이 울었다. 그것이 바로 귀신들에게 속는 것인지는 전혀 몰랐다.

조상의 혼령들은 "굿을 해줘서 고맙다"며 수도 없이 치하했다. “머지않아 돈 많이 벌게 해줄게. 넉 달만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기게 해줄게”라며 복을 빌어줬다.

다음날 아침, 굿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땐 앞길이 대로같이 활짝 열릴 것 같은 기대에 가슴마저 한껏 부풀었다.

주님, 저 무당되기 싫어요!

그러나 굿한 지 5개월이 지나도록 좋은 일이 생기기는커녕 친척 집안들까지 우환이 겹겹이 겹쳤다. 밤마다 꿈에는 조상들까지 나타나서 굿을 한번만 더 해달라고 야단이었다. 무당에게 말했더니 굿을 한번 더 하지 않으면 내게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거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장삿속이구나!’

굿 한번 할 때 250만원이나 드는데 일년에 몇 번씩 굿을 하려면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해댄단 말인가. 그 무당을 친언니처럼 믿고 따랐는데 장삿속으로 내가 이용당하고 있던 거였구나 하는 배신감에 떨며 무당집을 뛰쳐나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미아리 점집 일대를 찾았다. 내가 정말 무당의 길을 가야 하는지 아닌지 그것만 물었다. 찾아가는 점쟁이들마다 다들 무당이 되는 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라고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충격이었다. 거리로 뛰쳐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 한 켠에 숨겨진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 무슨 죄가 많아서 제게 이런 길을 주시나요? 진짜 무당 되기 싫어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 제발 무당 되지 않게 해주세요!”

순식간에 원망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울부짖음이 되었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모두 교회에 다녔다. 친정 집안의 지긋지긋한 귀신과의 인연을 끊고 싶으신 어머니는 교회에 열성적이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생계를 책임져야했던 어머니는 차츰 교회와 멀어지셨고 우리 4남매들도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됐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엔 내가 주님의 자녀라는 생각이 늘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무당집에서 나올 땐 혼자 중얼중얼 주님께 기도하곤 했다. 제발 무당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비록 믿음이 없어 악한 영들의 궤계에 속아 고통당하는 나약한 죄인의 기도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너는 나의 것이요, 나의 사랑이도다

속는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무당을 만나 매일 점치는 생활을 계속하던 2003년 4월 어느 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 전부터 교회에 다녔다는 얘기였다. 교회 가고 싶다는 말이 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정말 교회에 다니고 싶으니 교회 분들에게 내 얘기를 잘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나는 주일날 혼자 구로구 궁동 연세중앙교회를 찾아왔다.

예배가 시작됐는데 내가 과거에 드렸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배 드리는 그 시간 그 자리에 주님이 와 계시다는 실감이 느껴졌다. 찬송 부르는 시간엔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너를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요 나의 사랑이도다..." “힘들고 지친 자여, 이 큰 어깨에 기대라...”

아무에게도, 부모형제에게도 고통을 털어놓지 못했었는데, 마음의 고통을 아시는 주님께서 어서 내 마음의 짐을 벗어놓으라고 위로해주시는 것 같았다. 새삼 내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믿어졌다.

‘주님, 제가 주님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주님이 여기까지 오게 하셨으니 앞으로도 저를 붙잡아 주세요.’

간절히 기도하자 무당과 어울려 점치고 굿한 것들이 뼈저리게 회개가 됐다. 그 첫 예배에 참석한 날부터, 지난 일년 육 개월 동안 거의 매일같이 가던 무당집에 다시는 가지 않게 되었다. 이젠 무당의 말을 믿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찢어질듯 아픈 주님의 가슴으로

두 번째 교회 온 날, 예배 드리다가 방언은사를 받았다. 방언은사는 믿음 좋은 사람들만 받는 것인 줄 알았는데 왜 나 같은 자에게 주셨을까. 귀신의 영을 받아 무당이 될 뻔한 내게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고 그 증거로 방언까지 받다니 정말 기뻤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날도 방언기도를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계속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점치고 굿하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찢어질듯 아팠다. 회개하는 나의 영혼도 이렇듯 가슴이 찢어지는데, 무당집 가서 점치고 굿할 때의 내 모습을 바라보시던 주님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지셨을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 때 주님이 내게 다정히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다.

‘네가 그렇게 힘들어 할 때 내가 너의 팔을 붙들었단다. 다시는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죄를 짓지 말아라’

심령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느끼는 순간,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 더욱 확실히 믿어졌다.

굿할 때 아버지와 할머니의 혼령이 오신 줄 알고 무당을 얼싸안고 울었던 일을 생각하니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 귀신들이 정말 내 아버지, 할머니였다면, 당시 20살이었던 내가 무당들과 밤새 굿 해주기를 바라셨을까. 내가 귀신의 종노릇하는 무당이 되기를 바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내 죄를 속죄해 주시려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귀신의 속임수에 빠져 무당을 찾아가 점치고 굿하며 귀한 돈과 세월을 낭비하고 울고 웃는 감정을 낭비했다니! 그런 나의 23살의 삶이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워 한없이 울었다.

복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놓여 있음을 나는 확실히 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삶엔 어떠한 마귀의 궤계도, 죄악도, 거짓도, 고통도, 두려움도 가로 막을 수 없다. 난 그 사실을 너무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는 이제 새로 태어난 어린 아이와 같이 내 인생을 예수 안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아직은 걸음걸이가 서투르고, 예수를 아는 지식이 부족해서 실수도 많이 하지만, 강단의 말씀을 통해 늘 새 힘을 얻고 있다. 생명과 복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다시는 악한 영들에게 속지 않으리라. 할렐루야!!!

세상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점집에 드나들고, 어느 인터넷 포털의 운세 서비스는 하루에 6만여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악한 영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적극적으로 속이고 도적질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귀신을 섬기며 미신을 지키지만 실상 귀신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죄짓게 하고, 저주받게 하고, 우상숭배까지 하게 해서 결국엔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원수요 사람의 원수이다. 자신의 영혼이 죽는 지도 모르고, 귀신에게 돈과 시간과 인생을 갖다 바치는 허탄한 일에서 이제는 돌아서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5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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