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것은 경상북도 영주시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1991년 6월 이었다. 당시 교사생활 6년째에 접어들던 나는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남편과 기차로 세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서 7개월 된 딸아이와 함께 자취를 하며 낮에는 교사로서, 밤에는 엄마로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다. 주말마다 그 먼길을 한번도 멀다하지 않고 나와 딸아이를 보기 위해 내려오는 남편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몇년만 기다리면 경기도나 인천 지역으로 발령이 날 수도 있었기에 젊어서 잠시 하는 고생이니 잘 참고 견디자고 다짐하며 부지런히 부지런히 ‘나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었다.
10년 동안 내 주변을 맴돌던 류머티스 관절염
그러나 나의 육신은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나의 삶에 협력자가 되어주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10년 가까이 늘 내 주변에서 맴돌던 류머티스 관절염이 심해지는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대학 3학년 때, 조금만 걸어도 무릎 관절이 저리고 아팠으며, 이유 없이 항상 피곤이 온몸을 휘감았었다. 어린 나이에 양쪽 엄지손가락이 손바닥으로 오그라들기까지 했을 때는 온 가족이 나로 인해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관절에 물이 차는 경우에는 수술을 해서 물만 빼내면 되지만, 나의 경우와 같은 류머티스 관절염은 수술을 할 수도 없었다. 잠시 외국에서 가져온 약을 복용한 적도 있었는데 그 약은 위를 갉아내는 듯한 통증 때문에 오래 복용할 수도 없었다. 그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침도 맞아 보고, 심지어는 나환자 촌의 약이 좋다는 말을 듣고 직접 나환자 촌까지 가서 약을 지어 먹기도 했다. 관절에 좋다는 것은 안 해본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한약방을 하시는 아버지 친구분께서 관절 속에 있는 나쁜 물질을 빼내야 한다며 한방에서 극약으로 취급하는 ‘부자’를 넣어 한약을 지어주셨다. 부자 성분 때문에 약을 먹은 직후 땀을 내지 않으면 뼈마디가 끊어질 듯 저리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구 지방의 한여름 더위에 불을 땐 방에 솜이불을 덮고 누워 내의가 다 젖도록 땀을 내야 했다. 그리고는 기진맥진하여 앉지도 못하고 쓰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약의 효과를 봤던지 손가락이 저리고 오그라드는 증상은 차츰 사라졌다. 그리고 1986년도에 대학을 졸업을 하고 그 해 3월에 경상도 북부지방으로 초임 발령이 났다. 그 후로 한 5년 동안 별탈없이 건강했으며, 대학시절부터 사귀어 오던 사람과 결혼하여 딸아이까지 출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신으로 일년 간 휴직했던 고등학교에 복직하여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 돌보기와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내려오는 남편의 시중들기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관절염이 재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에는 육체의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이 함께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낮에는 웃고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 집에 돌아와서 혼자 있을 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사건으로 여겨졌다. 온몸이 피가 통하지 않는 것같이 저릴 때의 기억은 정말 돌이키고 싶지 않다. 심장이 터질듯이 답답하여 깊은 한숨을 자주 내쉬곤 했다.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관절염이 온몸 구석구석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는 생각과, 그 때 못 고친 병을 이제 와서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설교를 듣다가 갑자기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같은 학교 교련선생님의 부인이신 홍집사님의 인도로 교회 한번 가 본 적이 없는 내가 ‘일일 부흥회’에 가게 되었다. 나는 성전 가운데쯤에 앉아서 선교단의 찬양을 매우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단원들이 모두 예의 바른 몸동작과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찬양을 하는 데도 호감이 갔지만, 어느 남자 단원이 춤을 추듯 찬양을 하는데, 그 자신이 정말 기쁨에 젖어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서울에서 오신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셨는데, 목사님의 설교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의 온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손과 발은 물론이고 입도 비틀어져 지고 혀까지 뒤틀렸으며, 발뒤꿈치와 등줄기까지 동시에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꼭 정박아처럼 침까지 흘리니 같이 간 이웃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육선생님, 와 그랍니까?”라며 울먹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편안했고, 이성의 분별력도 온전했다. 그리고 ‘내가 낫는다’는 마음이 들었다. 왜냐 하면, 정확하게 과거에 내가 아팠던 부위들이 다 뒤틀렸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설교는 계속 되었고, 나의 뒤틀림도 계속되었다. 뒷자리에서는 영주 인근에서 은혜받기 위해 왔던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이 고등학교 교사가 말씀을 듣다가 온몸이 뒤틀리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고 한다. 통성기도 시간이 되자, 나의 두 팔은 저절로 하늘을 향해 펼쳐졌다. 그리고 다시 두손을 모아 천천히 가슴 위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동시에 나의 입에서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예배 후, 그 교회에 다니는 학부형들이 몰려 와서 “선생님, 축복받았심더. 여기 병 나으려고 환자들이 많이 왔는데 선생님 혼자 나았어예!” 라고 했다. 그 교회 안수집사인 교련선생님이 나를 서울에서 오신 목사님께 데리고 갔는데,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도 예수 믿지 않으면 이렇게 병마가 틈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죄요, 마음으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죄요,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라고 하시면서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 곧장 서울로 가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연세중앙교회 담임 윤석전 목사님이셨다. 성령 충만한 그 목사님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되는 순간, 십년 동안 그렇게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며 나를 괴롭히던 류머티스 관절염이 깨끗이 치유된 것이다.
며칠 후, 시골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이 자취집으로 심방을 오셔서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실 때, 나 모르게 나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강한 외침이 되어 터져 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 버 - 지 -------------------- !”
나는 무릎을 끓어 엎드린 자세로, 그 간절한 외침은 지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나의 이성은 ‘아, 이것이 영혼이라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으며, 그 이후, 나는 조금이나마 이성과 영혼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일은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돌아서는 확실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나의 영혼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오열로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채, 아무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분이 나의 아버지임을 확실히 알았고, 아버지 품에 안겨 몇시간을 울며울며 과거의 죄악된 삶을 회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가슴의 답답했더 응어리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사라져 버렸고, 손과 발도 부드러워졌으며 다시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일기예보로 통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덧,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지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 만남 이후 단 한번도 그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셨고, 더 온전한 믿음과 인내로 나를 새롭게 변화시키셨다. 무엇보다 말씀을 따라 사는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심을 체험하며 살게 하셨다. 그 동안 나는 부모형제와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특히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는 매주 남편만 시골로 내려오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서울로 가서 살림을 돌보고 남편을 편하게 섬기면서 그를 주님께로 인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93년 3월 하나님의 은혜로 5년 동안의 주말부부생활을 청산하고, ‘나의 길’보다 주님 안에서 ‘아내의 길’과 ‘어머니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의 선택 앞에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귀중한 ‘구원받은 자의 참된 삶’과 ‘하나님만 섬기는 가정’을 선물로 주셨다.
위 글은 교회신문 <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