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행복한 사람입니다

등록날짜 [ 2004-05-22 10:37:44 ]

부모님의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던 어린시절

나는 1951년에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집 형편이 어려워져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아버지께서 완도에 교사로 근무하시게 되어 우리집 형편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버지의 교사 봉급으로 남동생 넷에 여동생까지 다섯명 학비를 대기에는 힘겨운 형편이라 나까지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댈 수는 없었다. 나는 못 배웠지만 동생들만이라도 많이 배워서 휼륭한 사람 되기를 바랬고 부모님께는 맏딸 노릇 제대로 하고 싶어 힘껏 가사일을 도왔다.

결혼에 대한 기대로 마냥 설레였는데

스물 다섯살에 남편과 결혼을 약속했을 때,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가슴 설레었다. 비록 서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이지만 마음만은 편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은 어릴 때부터 피땀흘려 번 돈으로 알고 지내던 형과 한정식당을 차렸다가 부도를 맞은데다 형이라는 사람이 잠적해버리는 바람에 돈 잃고 사람 잃은 충격으로 몹시 괴로와하고 있었다. 남편은 원래 근면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형이라는 사람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과 화투을 배워 밤낮으로 밖으로만 돌았다.

돈만이 살 길이라며

그러다가 큰아들 성문이가 태어나자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는 오직 돈만이 살 길이다 싶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부업을 했다. 둘째아들 성호가 태어날 때쯤에 남편은 오년 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두 번이나 사우디에 다녀왔다. 남편이 외국으로 돈벌러 간 사이에 나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남편이 번돈은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았다. 친정에서 도와준 것과 합해서 작으나마 내 집도 마련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사느라고 아이들과는 어미정 한번 따스하게 나누지 못했고, 내 몸의 기력은 쇠할 대로 쇠약해 졌다.

일어날 기력 잃고 병석에 누워

1993년말, 지금 사는 미아리 3층집을 새로 지어 이사를 하고 피곤해서 자리에 누운 것이 꼬박 11개월 동안 혼자서는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봤지만 신경성이라고만 했다. 침도 맞아보고, 한방병원에도 가보고, 굿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병에 차도가 없다며 예수 믿는 시댁 조카가 나를 저희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집은 교회 안에 있었는데 새벽 종소리가 들릴 때는 하나님이 나를 예수 믿게 하시려고 여기에 데려다 놓으셨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얼마 후, 남동생들이 나를 쉬게 하려고 완도에 있는 여동생집에 데려다 줬다. 여동생은 언젠가부터 예수를 믿고 있었는데 나만 보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로운 삶을 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빈정거렸다. “하나님이 살아 있으면 왜 나를 이렇게 살게 하니? 하나님이 정말 살아 있으면 내 눈 앞에 보여줘 봐. 그러면 내가 믿을게” 예수 믿지 않는 남동생들과 올케들이랑 합세해서 여동생을 외면하고 따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내 몸이 이렇게 병 들고 보니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나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서 교회에 나가지는 못했다. 한달 보름만에 고3짜리 큰아들이 걱정이 돼서 집으로 오려고 할 때, 서울 가면 꼭 교회 나가겠다고 동생과 약속을 했다. 동생집에서 올라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 몸은 마치 쇠사슬에 묶였다 풀려난 듯이 거짓말 같이 나았다. 동생이 나를 위해 눈물흘리며 기도한다더니 정말 기도가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동생이 장거리 전화를 할 때면 미안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교회에 다녀왔다고 거짓말도 했다. 그 다음 해인 1995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내 몸도 좋아지고 큰아들도 대학에 들어가고 해서 이것이 사는 재미인가 했더니, 작은아들 성호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취직을 해버렸다. 어떻게 해서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내게는 되었지만 학업을 도중에 포기했으니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져

그 때 내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보면 설움도 많았다. 배우지 못한 설움, 정도 들기 전에 남편의 방황을 지켜보아야했던 설움, 병들어 마음으로 수없이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설움 등 수많은 설움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자식이 배워야 할 나이에 배우지 않고 부모의 가슴을 멍들게 할 때는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자신이 못난 사람이었기에 손톱만큼도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남을 존중해주며 살려고 했고, 배운 학문은 없어도 마음만은 진실하고 올바르게 살려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을 존중해주면 뒤돌아서서는 나를 속이려 했고, 얼키고 설킨 오해로 나를 미워해서 나의 자존심을 몸시도 상하게 했다. 나는 최선을 다 한다고 했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수한 돌맹이들뿐이었다. 인생은 다 이런 것인가? 내가 못 배워 그런걸까? 애궂은 부모님을 원망했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원망해 보다가, 그리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내 자신도 원망해 보았다. 이러다보니 신경쇠약 증세로 극도로 예민해져서 조그마한 일에도 가슴이 벌벌 떨리고, 자주 놀라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를 수없이 했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하나님

1998년 2월경 문득 완도 여동생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그날도 남편에게 괜히 짜증을 내고 마음이 언짢은 중에 동생 생각이 난 것이다.
‘언니, 꼭 하나님을 만나봐. 그러면 언니도 인생을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사람들은 예수 좀 제대로 믿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에 미쳐 돌아다닌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남편은 예수 믿으려면 아예 나하고 이혼하고 믿으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다. 그 당시 내 마음은 예수에 미치더라도 정말 하나님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동생과 약속하여 수원 흰돌산기도원에서 만나 난생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교회 직분자들을 위한 설교였지만 가만히 듣고 보니 모두다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들여다 본 것처럼 하나하나 지적하시는데 내가 걸어온 인생길이 한걸음 한걸음이 다 죄뿐이었다. 착하게 살았기에 죄가 있다면 가난하게 산 것만이 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째날은 낮시간에 청년성회 실황을 비디오로 관람했다. 청년들을 바로 가르치려고 몸부림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도 내 자식 성문이 성호 잘못 가르친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세째날 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만나봐야겠다고 결심을 했고, 통성기도시간에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죄부터 회개하기 시작했다.
‘예수님, 알고 보니 내가 정말 죄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남편과 내 자식들 원망한 것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나도 하나님을 꼭 만나게 해 주세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통성기도가 끝날 무렵이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끊어질듯 당기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동생이 나의 모습을 보더니 합심해서 기도를 도와 주었다. 그 때, 갑자기 내 입에서 알아들을 수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방언이라는 것이었다. 내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태어나서 그렇게 기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계속 기도를 했다. 정말, 분명히 하나님이 그 넓은 가슴으로 내 기도를 다 듣고 계시고, 나의 상하고 찢기고 애통하고 고통받은 마음들을 다 알아주셨고 그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오! 하나님 아버지” 나는 계속 기도하고 싶었지만 종소리가 나서 기도를 멈췄다. 기도를 마쳤을 때, 집채만한 바윗덩이가 억누르고 있다가 사라진 것같이 가슴이 시원했다.

남편 간암 믿음으로 고치고 다시 일터에

집에 돌아오자 남편이 미운 마음은 어디가고 남편에게 말도 붙이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리고 노량진에 있는 연세중앙교회에 가서 등록을 했다. 남편에게도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카셋트로 목사님 설교를 들려 주었다. 남편은 설교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며 본인이 교회에 나와 등록했다. 그리고 남편이 간암 말기와 간경화 초기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처음에는 믿음이 없어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윤석전 담임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직접 병원에 오셔서 기도해 주시고 직분자들이 자주 심방 와서 기도해주시자 남편에게 믿음이 생겨 2차로 방사선 치료을 위해 입원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매달리게 되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설교를 마치신 목사님께서 환자석에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고 사모님께서도 자주 안수기도를 해주셔서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흰돌산 기도원에 성회가 있을 때마다 작년에 교직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친정아버지와 어머님을 모셔와서 말씀을 들으시게 했더니, 두 분 다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지금은 완도에서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신다. 큰아들 성문이와 작은아들 성호도 제 아버지가 아플 때 마음을 합해서 기도하자고 설득했더니 교회에 나와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작은아들 성호는 마음을 잡고 완도 이모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번 추석축복대성회 때도 여동생 내외가 성호를 데리고 와서 우리 온 가족은 기도원에서 상봉을 하고 은혜도 듬뿍 받았다.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다 아시니 어떤 돌맹이를 맞아도 이제는 아프지 않다.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우리 가족이 변함없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과 남동생들과 친척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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