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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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세중앙교회에 처음 온 것은 노량진 성전으로 이전한 이듬해인 1993년 10월 경이었다. 당시 나는 스물세 살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악성빈혈로 고생을 많이 해서 무척 병약한 상태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일 밤 경기를 했고, 어지럼증으로 아무데서나 쓰러지곤 했다. 연세중앙교회에 와서도 2~3년 동안은 전철을 탈 때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면서 눈앞이 깜깜해졌고, 이를 악물고 깡으로 버텨보지만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 하는 순간 그 자리에 쓰러지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체험은 없었다. 그러다가 직장동료가 은혜롭다며 건네준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통해서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며 바로 이곳 연세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직장을 마치면 곧장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심방했다. 매일 철야예배는 물론 모든 예배란 예배는 거의 빠진 기억이 없을 만큼 늘 예배를 우선하는 생활을 했다.
배 곯아도 하나님 것 먼저
내가 연세중앙교회에 등록할 당시, 노량진 성전을 구입하고 잔금을 치르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성도들이 모이면 잔금을 위해서 기도하고 너도 나도 드리기를 사모하였다. 당시 치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나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남들에겐 적은 액수지만 분에 넘치도록 대출을 받아 헌금했다. 그 후, 전국 성도들의 영성회복 장소로 쓰임받고 있는 지금의 흰돌산수양관을 구입하고 신·증축을 시작하였는데, 또 성령의 감동을 받아 대출하여 힘껏 드렸다. 그렇게 늘 하나님 것을 우선하며 살다보니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힘겨웠다. 식사는 직장에서 점심 한 끼로 때웠다. 그러자니 저녁을 거르고 매일 새벽 2~3시 경까지 철야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허기가 져서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 프림을 연탄불에 끓여서 훌훌 마시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어쩌다 쌀을 사면 물에 퉁퉁 불려 밥량이 많아지도록 밥을 지었다. 반찬은 늘 쌈장 하나였지만 꿀맛이었다. 힘겨운 생활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힘든 환경도 힘든 줄 모르고 기쁘기만 했다.
눈물로 부른 찬양
악성빈혈인 내 체력으로는 감당치 못할 초인적인 신앙생활을 2년여 하는 동안 영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충만했지만 육체적으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도 있었다. 워낙 병약한 몸이라 예배시간이 길면 참기 힘들어 허벅지를 긁어 피가 난 적도 있었다. 또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에 성가대를 지원했는데 호흡이 긴 음을 내고 나면 가슴을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아팠다. ‘이러다 나 죽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니까 울면서 찬양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찬양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너무나 견딜 수 없는 아픔에 울면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으니까 가슴 아픈 거 제발 고쳐 주세요.’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던 중, 교회에서 SBS 성탄전야 프로그램에 나가기 위해 사도신경이란 곡을 연습했다. 이 곡은 호흡이 너무 길어서 무척 걱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연습에 임하자 긴 호흡을 해도 조금도 숨이 가쁘지 않더니 그 후로 아무리 긴 음을 내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악성빈혈로 20여년을 고통받던 내겐 상상치도 못하는 일이었다.
한번 기도의 응답을 받자, 내친김에 아예 악성빈혈 자체를 고쳐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5일 금식을 할 테니까 악성빈혈 싹 고쳐주세요. 금식하는 기간 동안 힘이 펄펄 넘치게 해주세요.”
준비 기도를 하루 3~4시간씩 일주일간 했다. 사실 내겐 한 끼를 굶는 것도 몹시 힘들었다. 전철에서 자주 쓰러진 것도 대부분 아침을 안 먹고 출근할 때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런 내가 5일 동안 금식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철저한 준비 기도가 필요했다. 기도한 대로 5일 금식을 하는 동안 조금도 어지럽지 않고 힘이 펄펄 넘쳤다. 그리고 금식을 마칠 때 믿음이 생겼다.
‘나 깨끗이 고쳤다. 나 이제 악성빈혈 아니다!’
당시 불신자였던 동료가 5일간 아무것도 안 먹고도 펄펄 날아다닐 정도로 멀쩡한 내 모습에 놀라 그 후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다. 지금 주일학교 김정미 교사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아들 셋을 다 자연분만으로 낳고 살면서 단 한 번도 어지럼증으로 고생해본 적이 없다. 악성빈혈에서 치유받고 나자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늘 빈 교실을 지켰던 것에 한이 맺혀 하나님이 고쳐주신 몸으로 워십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다.
영안실에 실려간 아버지 살아나
기도의 응답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악성빈혈에서 치유 받고 하루하루 감사와 기쁨 속에 행복하게 살고 있던 중, 하루는 오빠에게서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 구원해주신다고 했잖아요. 제가 눈물로 기도하고 있잖아요.’
오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 안 돌아가셨어’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아니야 오빠, 아버지 안 돌아가셨어”라고 말하자 오빠가 “너 예수 믿더니 완전히 미쳤구나.”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길로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정말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내가 아무리 안 죽었다고 소리질러도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부림을 쳐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야.”
분명 의사들이 호흡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하고 영안실로 보냈는데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구원해 주시려는 계획임을 알았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왜 아버지를 다시 살려주신 줄 아세요? 예수 믿고 천국 오시라고 기회를 주신 거에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떡이셨다. 퇴원 후엔 우여곡절 끝에 내가 자취하는 집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방 한 칸을 더 얻어 아버지를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자, 팔십 노인이 매일철야예배까지 드리고 기도하시면서 성령이 충만해지셨다.
하루는 아버지가 생활비에 보태라고 30만원을 내놓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면 받을 상급이 없을 것이 염려돼 그 돈으로 금반지를 해드렸다. 그리고 천국가실 때 아버지 몫으로 꼭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 나를 위해 시집갈 밑천으로 준비해 놓으셨다는 약간의 돈도 아버지 몫으로 하나님께 드리자고 했더니 처음엔 반대하시다가 곧 허락하셨다. 두달간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고통 없이 임종을 맞으실 때 아버지는 하나님께 드릴 반지며 통장을 챙겨놓으시고 환한 얼굴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부어주시는 축복
“하나님이 두레박에다가 황금을 계속 부어주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것을 받아다가 그대로 교회에 갔다 부었지."
궁동성전 부지가 확정되던 2002년 초반기 무렵, 남편이 꿈 이야기를 했다. 교회부지가 결정된 시기에 그런 좋은 꿈을 꾸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물권을 주시는 꿈인가 싶었다. 사실 물권을 달라는 기도를 많이 했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음을 위해 마음껏 쓰고 싶어서였다. 남편과 나는 무엇이라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전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남편도 하던 사업을 정리한 상태라 전세금 외에는 가진 돈이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싶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다시 한번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전세금을 빼고, 신용만으로 카드대출을 받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장을 개업한 이후 잘 운영하고 있다.
시댁과 친정의 구원
하나님의 응답은 갈수록 놀라웠다. 30년 남묘호렌켄쿄를 믿으셨던 시어머니가 최근 우리 교회에 등록하였다. 남편이 어머니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남묘호렌켄쿄의 본존불을 없애 버렸다. 어머님이 쓰러지고, 깨어나자 집을 나가시는 등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졌으나, 지금은 시어머니가 궁동성전근처로 이사하시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계신다.
친정 어머니에게서도 예수 믿는다는 연락이 왔다. 멀리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도할 기회가 없어 기도했더니, 예수 잘 믿는 권사님을 통해 교회에 다니게 되었으며 요즘 에는 출석하는 교회에서 전도왕이 되셨단다. 기도마다 응답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위 글은 교회신문 <8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