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 찾은 소망

등록날짜 [ 2006-11-14 11:55:25 ]


캄캄했던 나의 자화상
2003년, 대학 1학년. 나는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술자리는 내가 주도하고 1차, 2차, 3차 끝까지 갔다. 술 먹고 노는 것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과 어울려 아낌없이 세월을 흘려보냈다. 어두운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하는 20살. 그때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피해의식이 강했다. 부모님은 남대문 시장에서 등산용품 도매상을 하셨기에 늘 밤늦게 돌아오셨고, 다섯 살 위인 언니와 나는 파출부 손에 자라다시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파출부 아줌마는 때때로 나에게 수면제를 먹였다. 아줌마가 강제로 음료수를 먹이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움츠러든다. 그 충격이었을까. 나는 중학교 1학년 이전까지 사시(斜視)였다. 나는 늘 외로웠다. 그 영향으로 애정결핍이 생겼고 폭식증으로 엄청나게 살이 쪘다. 매사가 부정적이었으며 강해 보이고 싶어서 눈 밖에 난 후배들을 괴롭히고 사사로운 것에도 엄청난 욕심을 부리며 싸우기 일쑤였다.

벼랑 끝에서 찾은 소망
2003년, 그해 여름.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등산용품 도매점을 정리하고 다른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실패를 거듭한 것이다. 3-4년 만에 결국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딱지가 붙여진 살림살이들이 인터넷경매에 들어가고, 빚쟁이들은 수시로 들이닥쳐 온 집안을 휘저어놓고 갔다. 처절했다고 해야 할까. 표현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는 가족 모두가 너무 힘이 들어서 날이 밝아오는 것조차 두려웠다. 평생을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게 살아오신 아버지 어머니는 좌절하고 낙망하고 너무도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하나님께 더욱 절실히 매달렸다. 그 즈음 집이 오류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철야기도 할 교회를 찾아 헤매시던 어머니는 연세중앙교회를 발견하고는 ‘하나님, 이제 살았습니다’ 하며 곧 교회로 달려가셨다. 그리고는 함께 연세중앙교회에 다니자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부탁에 못 이겨 연세중앙교회에 등록했다. 그리고 어둡기만 했던 나의 자화상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누더기 옷을 입으신 예수님
추석 무렵, 흰돌산수양관에서 열린 추석성회에 참석했다. 나는 첫날부터 머리가 멍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다녀본 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육신의 소욕대로 즐겁게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진노 안에 살고 있음을 발견한 순간, 저절로 회개가 터져 나왔다. 나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통곡하면서 기도했다. 한참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내 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가락만한 크기의 예수님은 누더기로 기운 옷을 입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계셨다.
예수님께 왜 그렇게 울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정민이 네가 죄 지을 때마다 이렇게 울면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그렇게 작으시냐고 또 왜 그렇게 초라한 옷을 입으셨냐고 물었더니 “이게 바로 정민이 네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이란다”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렇게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울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음이 에리고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죄인 줄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살았던 시간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환경을 탓하며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어머니 주머니에서 돈을 슬쩍하기도 했고 후배들을 괴롭히기도 했던 지난날들.... 얼마나 통곡하며 울었는지 모르는데 어느새 내 입에서는 방언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을 주님 앞에
세상과 이어진 끈을 끊었다. 술은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역겹고, 세상 친구들과의 만남은 지루해졌다. 거꾸로 돌아가던 내 삶이 이제 제자리를 찾았다. 어머니와 함께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하고 새벽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갔다.
2003년 초겨울 무렵, 경매가 붙여진 집은 빚쟁이들의 서릿발 선 독촉으로 가득 찼다. 매달릴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교회 청년 대학부에 소속된 나는 모임마다 참석했다. 입시철이었던 어느 날은 원서를 내는 수험생을 대상으로 캠퍼스 전도를 나갔다. 이미 경매문제는 하나님께 맡긴 상태였기에 마음을 비웠다. 새벽부터 기도로 시작한 캠퍼스 전도 모임은 서너 군데 학교를 돌면서 하루 종일 이어졌다. 육체는 쓰러질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래도 피곤한 육체를 이끌고 밤늦게 교회에 오면 그날 전도한 영혼들을 위해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하나님 그들을 살려주세요. 저만 천국에 갈 수 없잖아요. 그들도 천국 가게 해 주세요.”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마다 좋은 일들이 생겼다. 경매에 붙여진 살림살이들이 제법 쓸 만한 물건인데도 인수자가 없어 물건을 가지러 오지 않았다. 그래도 하루는 경매 물건을 인수하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마침 그날 집에는 나 혼자였다. 무서워서 소파에 앉아 한참을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이 상황이 너무 무섭고 싫어요.”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걱정 말아라” 하루 종일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 자연스레 경매는 무마가 됐다. 한동안 무섭게 빗발치던 빚쟁이들의 독촉도 차츰 누그러지더니 여유가 생기면 조금씩 갚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
캠퍼스 전도를 하느라 공부도 열심히 못했는데 과대표에 2학기 연속 장학금까지 받게 됐다. 주님께 드린 시간만큼 내게 복을 주시니 더욱 감사함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었다.
2004년도에는 캠퍼스 기도 모임을 더 열심히 가졌다. 나도 더 많은 영혼을 품고 기도하는 순장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도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하나님, 우리 기도모임이 부흥되게 해주세요. 아무도 없다면 저 혼자서라도 기도 할게요” 그 약속을 지켰더니 점점 전도가 활발해졌고 기도 모임 인원수가 많아졌다. 결국 나는 순장의 직분을 맡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더해주셨다.
순장이 되어 10명이 넘는 영혼들을 섬기다보니 심방하는 날도 많아져서 더 바쁘게 뛰어야 했다. 2학기가 되자 취업준비를 하느라 바빠진 같은 과 친구들은 자격증을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에 비해 나는 전도하느라 더욱 바빴다. 취업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어떤 때는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기에 더 열심히 심방하고 기도하고 전도했다.
그 후 막상 취업을 하고보니 나보다 더 노력한 친구들보다 내가 더 좋은 곳에서 일하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신 것이다. 입사한 후에도 나의 장점만 높이 보게 해주셔서 아예 한 분야를 나에게 맡기기도 했다.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 이어졌다. 2005년 3월경에 할머니의 병환이 깊어졌다. 뼈속까지 찌든 불교신자로 오랫동안 어머니를 핍박하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교회 집사님들과 함께 찾아가 예배를 드렸더니 연신 “할렐루야”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결국 방언은사까지 받으시고 환한 얼굴로 천국에 가셨다. 그 때 난 ‘아, 이것이 축복이구나’ 하고 느꼈다.

공연기획의 비전
윤석전 목사님께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한 가지씩 분명히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나도 비전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 가운데 공연기획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내가 가진 달란트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앞으로 그 분야 공부를 열심히 해서 멋진 공연기획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로 영광을 돌리고 싶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멋진 주님과 함께 나의 미래는 멋진 자화상이 그려진다. 나는 비록 세상의 백만장자나 권세자의 배경은 없지만 하나님이라는 큰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후원자 되시기에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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