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1-25 14:05:06 ]
어머니 투병생활 속에 구원받고 천국으로
친누나들과 매형, 조카들까지 주님께로 인도돼
어릴 때 외할머니만 교회에 다니셨다. 나는 그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노는 것만 좋아해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아르바이트하며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고 노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다 2006년도에 직장을 소개받아 서울로 오게 됐다. 막상 소개받은 직장은 나와 전혀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른 직장으로 옮겼을 때 이 직장은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상사는 물론이고 일하시는 분들이 다 연세중앙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아침마다 직원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사무실에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와 찬양을 늘 틀어놓았다. 그러다 상사인 김학주 집사의 전도로 교회에 오게 됐고 지속적인 부원들의 관심과 연락에 가끔 나오는 정도였다.
신앙생활에 흥미 느껴
2007년 여름하계성회를 앞두고 풍성한 청년회에서는 T-콘테스트 준비가 한창이었다. 우리 팀에서는 대중 가수 ‘동방신기’를 패러디한 ‘주방신기’를 만들었고 그중 한 멤버로 내가 지목됐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원래 그 자린 다른 직분자가 하기로 돼 있었고 몇몇 직분자들은 믿음 없는 내가 주방신기 멤버로 공연한다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어찌 됐던 새벽까지 주방신기를 준비하면서 육체는 피곤한데 할수록 재밌고 합심기도라는 것도 하게 됐다. 또 한편으론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듯한 느낌이 들어 굉장히 뿌듯하고 은혜가 됐다. 주방신기를 계기로 드디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고, 2008년도에는 부장님의 권면으로 조장의 직분을 맡았다.
하지만 사당동에서 같이 살던 동생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던 터라 같이 술 마시고 노는 것에 종종 휩쓸렸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인데 교회도 잘 안 나오고, 죄짓고,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마음에 직분을 내려놓으려고 했었다. 부장님은 기도해보라고 했지만 기도도, 말씀도 죄책감에 눌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몸에 생긴 22센티미터의 혹
그러다 2008년 여름, 마산에 계신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외할머니와 믿음이 없던 어머니를 우리 교회로 초대했다. 처음부터 윤석전 담임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내가 좋은 교회에 다닌다며 무척 기뻐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혹을 제거하기 위해 큰 병원을 찾았지만 너무 위험한 수술이라 할 수 없다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결국 누나가 아는 개인 산부인과 병원에서 혹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암세포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하니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권했고 결국 암으로 진단받았다.
진주 모 병원에서는 악성종양이 자궁부터 폐까지 퍼졌고 또 온몸으로 퍼질 것이라며 그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몇 개월 살지 못한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한 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에서 놀기 좋아하고 예배도 잘 빠지는 나였지만 지금 내가 잡을 손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매달리는 심정으로 작정 기도에 들어갔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함께 청년회 전체가 어머니를 위해 중보기도에 들어갔고 부원들은 합심기도와 릴레이 금식기도까지 하며 나를 도왔기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늘 무서운 꿈에 시달리셨는데 어느 날은 머리가 일곱 달린 마귀가 물속에서 나와 어머니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는데 도망쳐 나오니 많은 청년이 찬양을 하고 있더란다. 나는 우리 교회 청년들의 기도와 금식이 얼마나 큰 힘이요, 생명인지 깊이 깨닫게 됐다.
천국 갈 길은 은혜 받는 것뿐
병원에서 예측한 어머니의 임종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말기 암이라 외출, 외박이 모두 금지였고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나는 청년회 부장님의 권면으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오기로 작정하고 이틀 금식하면서 새벽 2시에 같은 부의 청년회원과 함께 마산으로 향했다.
아침 7시,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와 가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병원 측에서는 추우면 간 수치가 떨어져 죽을 수 있다며 서울 가는 것에 결사반대했고 가족들과 어머니 역시 고개를 저었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설득해도 꿈쩍하지 않는 가족들을 보며 서서히 지쳐갈 무렵, 기도하고 있다는 부원들의 문자 그리고 같이 간 청년회원이 믿음으로 붙들어 주어 다시 한 번 힘을 내 설득하기 시작했다. “가다가 죽으면 어찌할 거냐?”라고 가족들이 따지듯 묻자 그저 “은혜 받아야 된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천국 갈 수 있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마음을 움직인 어머니는 저녁 7시쯤 서울로 출발했고 무사히 주일 새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걷지 못하는 어머니를 안고 자모실로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동안 어머니는 화면 속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내내 우셨다. 그 후 다시 진주 경상대병원으로 내려가신 어머니는 매일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와 찬양을 들었고 무섭고 어두운 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12월을 못 넘긴다고 했는데 6개월을 더 사셨다. 또 편하게 웃으면서 임종을 맞이하셨다.
어머니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
어머니는 투병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받으셨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가족들 역시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돼 작은누나와 매형은 우리 교회에 등록했고 진주에 사는 큰누나와 조카들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이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어머니를 떠나보낸 빈자리에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다. 성전 근처로 이사하게 하셔서 같이 죄짓고 놀던 동생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하셨고 지금은 전도부 차장으로 충성하고 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너무 길어서 졸리고 지루했던 한 시간의 예배가 지금은 20분 정도로 짧게 느껴질 만큼 은혜받고 있다. 또 영혼 사랑하는 마음과 구령의 열정도 주셔서 매일 저녁 전도부원들과 함께 부천 역곡역으로 나가 전도하고 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다 나으면 같이 전도하러 가자”던 말씀이 가슴에 깊이 남아 있어서 전도가 더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전도하면서 나처럼 세상에 물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꾼으로 세워지길 기도하며 전도에 주력할 것이다. /김은혜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17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