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2-24 10:49:19 ]
지독한 외로움과 향수병, 주님 사랑으로 이겨내
병든 시어머니 극진히 간호하며 천국까지 인도
<사진설명> 두 딸과 함께
스물여덟 살 때인 2005년 여름, 지인의 소개로 한국인 청년과 결혼하고 한국에 들어올 때, 병든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모실 각오를 다지고 왔다. 하지만 막상 한국생활은 기대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남편은 생활력이 강하고 정직한 사람이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이 없는데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감정 표현을 거의 못 하고 벙어리처럼 지내야 했던 나는 몹시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했다.
남편이 출근한 후에는 병든 시어머니와 단둘이서 온종일 지내려니 외로움과 향수병이 깊어져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사랑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한국에 와 있던 오빠를 통해 2005년 겨울 연세중앙교회로 인도해주셨다.
주일예배마다 능통한 한족의 통역으로 윤석전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은혜 받으니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깊이 체험됐다. 예배 후에는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어로 마음껏 찬양을 부르면서 차츰 마음이 평안해지니까 한국생활이 즐겁고 기쁘게 느껴졌고, 어렵고 힘겨운 환경도 좋게만 보였다. 그리고 기도하면 항상 하나님께서 ‘네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모셔라’, ‘남편에게 인내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당시 78세인 시어머니는 골다공증, 관절염 등으로 무릎이 몹시 아프셨는데 당뇨가 심해 수술도 못하는 상태였다. 집안에서도 지팡이 없이는 거동을 못하고 침대에 누워 계셨다. 나는 그런 시어머니께 전심으로 효도해 드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국 반찬을 할 줄 몰라 중국 반찬을 해 드렸지만 차츰 교회 자매들과 시누이들에게 배워서 시어머니 입에 맞는 한국 반찬을 해 드리면서 섬겼다.
한국에 온 지 일 년이 지나고 첫 딸을 낳은 지 3개월 됐을 때였다. 시어머니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해서 부축해서 가던 화장실 출입마저도 하지 못했다. 소변은 내가 통을 들고 받아내면 되지만, 대변을 볼 땐 몹시 고통스러워 하셨다. 장 질환에다가 변비까지 심해서 비명까지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면봉으로 파내 드렸다. 그 후 변비약을 드시자 이번엔 본인도 모르게 계속 대소변이 흘러나와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어 드리고, 연고를 발라 드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젖먹이를 돌보면서 시어머니 병구완까지 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셨기에 기쁜 마음으로 섬겼다. 시어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는 내게 몇 마디 말씀이 없었지만 시누이들이 오면 내 칭찬을 했다. “며느리에게 시킬 일 아닌데….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다…”고.
시어머니 병세가 나빠진 지 6개월째 됐을 때였다. 하루는 시어머니 방으로 식사를 갖다 드렸는데 조금도 드시지 않고 이상한 옷을 차려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었다.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니 “죽은 남편과 친척들이 나를 마중하러 왔어. 거기 가면 고통이 없다고 하지만 난 거기 가기 싫어”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제야 나는 시어머니의 구원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일 교회에 가서 중국선교실 전도사와 부원들에게 시어머니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며칠 후 중국선교실 전도사와 실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전도하자 시어머니께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그 후에도 중국선교실원들이 자주 심방 와서 기도해 주셨는데 기적적으로 시어머니 병세가 크게 나아졌다. 혼자 걸어서 화장실도 가시고, 혼자 일어나 식사도 하시고, 방에서 혼자 왔다 갔다도 하셨다.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일 년이 넘도록 시어머니가 건강하게 사시던 중, 하루는 아침 식사를 권해도 안 드시더니 점심도 전혀 드시지 않았다. 소화가 안 되어서 그런가 하고 소화제를 드린 후 저녁 5시쯤에 또 식사를 권해도 안 드시고 화장실에 가시더니 오래 있어도 변을 보지 못하셨다. 이상하다 싶어 남편에게 전화해서 구급차로 병원에 모시고 가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면서 중환자실로 옮겼다.
교구장님께서 “의식이 없으셔도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 테이프를 들려 드리세요, 영혼은 들어요”라고 하셨다. 일주일 이상 마치 식물인간처럼 미동도 없이 의식을 잃고 누워 계신 시어머니 귀에다 이어폰을 꽂아 설교 말씀 테이프를 들려 드리고 옆에 앉아 끊임없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믿지 않는 시누이들이 “귀 아프시니까 꽂지 마세요”라고 했지만 나는 계속 말씀을 듣게 해 드렸다. 그리고 아무 의식이 없는 시어머니께 “예수 믿고 천국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시누이들이 그런 나를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시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은 마음에 더 애절히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금식 기도하면 응답이 빠르다”는 말을 듣고 금식하면서 시어머니 옆에서 기도했는데 시어머니가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마치 나의 기도를 듣고 있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옆에 있던 남편도 그 모습을 보았다. 나는 어머님이 지금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바로 그다음 날인 주일, 예배드리러 차를 타고 교회로 가는 길에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시어머님께서 천국에 가셨다는 것을 확신하였기에 하나님께 ‘그 영혼을 받으소서’ 하는 기도를 드렸다.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둘째딸을 낳고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남편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없어진 제사 문제로 때때로 나를 힘들게 하고 아이들이 아플 때는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플 때 드리는 간절한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남편은 직접 눈으로 보며 살고 있기에 조금씩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있다.
모든 것이 낯선 한국 땅에서 이처럼 주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믿음과 사랑과 인내할 힘을 공급해주는 성령 충만한 교회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드린다.
<다음은 중국어 원문>
위 글은 교회신문 <230호> 기사입니다.